용궁시장 매력찾기(1) 터줏대감들의 입담

▲ 지난 6월, 시설현대화사업을 완료하고 '문화관광형 시장'으로 거듭난 삼천포 용궁수산시장에서 상인과 손님이 가격을 흥정하고 있다.

‘기억’은 머리가 하고, ‘추억’은 가슴이 한다. 뇌세포에 기록되는 일들은 세월에 씻겨 지워지기도 하지만, 오감으로 경험하고 온몸에 담은 사연들은 일부러 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는 법이다.

수완 좋은 장사꾼들은 밑천이 떨어질 때마다 ‘추억’을 꺼내 놓는다. 아무리 각박하게 살았어도 누구나 한 줌의 추억은 가진 법이어서, 이를 펼치기만 하면 너 나 할 것 없이 주머니를 턴다. ‘복고(復古)’가 경기를 타지 않는 사업아이템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추억의 8할은 사람이다. 그것을 만드는 것도, 담은 것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TV를 통해 공유하는 추억에 쉽게 질리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사람을 통한 것이 아니라, 잘 포장되고 다듬어진 상품으로 ‘소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 대면한 사람과 나누는 것이라면 그 빛깔과 맛이 전혀 달라진다.

남해바다를 끌어안은 삼천포용궁수산시장(용궁시장)에는 활어처럼 살아 숨쉬는 ‘날 것 그대로의 추억’이 가득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갯바람을 맞은 덕분에 짭짤하게 간이 배어 있어 듣기도 좋았다. 아침 손님들이 한바탕 쓸고 지나간 9일 오전, 상점을 돌며 추억을 쇼핑했다. 흥정은 어렵지 않았으나, 만나는 사람마다 실한 사연들이 만선이었던 탓에 그 모두를 실어올 수 없었던 게 내내 아쉬울 따름이다.

▲ 김정자(72) 할머니. 52년째 용궁시장을 지키고 있는 자타공인 용궁시장 터줏대감이다. 은퇴 이후에는 '바깥어르신'과 함께 노래방에서 실컷 노래를 부르며 여생을 보내는 게 꿈이다.

김정자(72) 할머니가 꺼내놓은 추억은 배고픔과 추위와 태풍이다. 스무 살에 시집을 왔는데, 신혼 첫 해에 ‘바깥어르신’이 몸져누웠다. 원망보다 먼저 찾아온 배고픔 때문에 용궁시장에 좌판을 깔았다.

“새벽 1시에 나오면 저녁 6시가 넘어서 집에 들어가지. 늙어서 병이 들었는데도, 일을 할 땐 신기하게도 몸이 움직여져.”

그는 지나온 52년의 세월을 단숨에 정리해냈다. 기나긴 무용담이 따를 법도 한데, 토막 낸 생선처럼 정갈하고 깔끔했다. 배고픔이 해결될 무렵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 뒷바라지에 시집 장가를 모두 보내고 나니 반 백 년이 훌쩍 지나있었다고 한다.

태풍이 부는 날에도 시장을 지켰다. 노점에서 시작해 파라솔을 쳤고, 조금 지나서는 천막을 마련했다. 고비마다 기구한 사연들이 없었으랴마는, 그는 한사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손사래를 쳤다.

“사람들은 제 멋대로 기억을 하나봐. 쥐포가 잘 팔려서 삼천포항이 호황을 누릴 때 모두 다 부자가 된 줄 알지. 그런데 알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벌지. 큰 배에 쥐포공장 가진 사람들이 돈을 끌어 모을 때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밑에서 날품을 팔며 머슴처럼 일했지.”

그러나 서러운 기억은 아니라고 했다. 어쨌든 시장 한 모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끼니를 해결하고, 자식을 키울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 집 영감이 내일모레면 여든인데, 평생을 골골거렸지만 아직 살아있어. 자식들 신세지지 않아도 될 만큼만 준비되면 영감이랑 함께 재미나는 일 실컷 하면서 살려고 해.”

그가 꿈꾸는 재미나는 일이란 결코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매일매일 노래방에 다니면서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부르는 일이었다.

▲ 김갑녀(74) 할머니. 하루하루 버틴 세월이 모여 '눈 깜빡할 사이'에 50년을 흘려보냈다. 홀몸으로 자식을 키우느라 고단한 나날들을 보냈지만, 그 땀이 2남 2녀의 자녀들을 세상에서 제일 가는 효자로 키웠다고.

김갑녀(74) 할머니도 50년 넘게 용궁시장을 지키고 있다. 최근 들어 ‘몸이 고장 난 탓’에 밥보다 약을 더 많이 먹고 있지만,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을 때는 빠짐없이 시장에 나온다.

“예전에는 먹고 살려고 시장에 나왔지만, 요즘엔 그냥 좋아서 나오는 거야. 얼마 전에 잠시 병원생활을 했는데, 정말 지겹더라고. 한 평생 눈만 뜨면 시장에 나왔는데, 눈을 떠도 갈수가 없으니까 마음이 이상해지더라고.”

차효열(63) 할머니는 35년째 ‘시장밥’을 먹고 있다. 나이나 경력이 적지 않지만, 시장에서는 내세울 만한 처지가 아니라고 귀띔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환갑까지만 일하려고 마음 먹었는데, 막상 그 나이를 넘기고 보니, 욕심이 생기더란다.

“다들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 내가 시장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여기서도 100세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

오랫동안 불황이 이어진 탓에 다들 힘들다고 아우성인데,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고단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이곳은 서민들이 모여서 서민들에게 생선을 파는 곳이야. 대단한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불황이 아니라, 나라가 망한다고 해도 큰 영향이 없어. 돌이켜 보면 우리를 위한 호황이 있기나 했어? 요즘엔 아무리 못 살아도 하루 세 끼는 꼬박꼬박 먹고 있으니 옛날에 비해 훨씬 좋아진 거지.”

▲ 차효열(63) 할머니. 환갑을 맞이하면 은퇴할 생각이었지만, 100세 장수시대에 발 맞춰 앞으로 40년 이상 시장을 지켜보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그래서 남들이 이야기하는 ‘삼천포항의 쇠락’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이 달라졌어. 도로가 시원하게 뚫려서 외지 사람들도 쉽게 찾아올 수 있고, 택배회사도 많아졌으니 전화 한 통이면 서울까지 물건을 부칠 수도 있게 됐잖아.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더 노력해야지. 세상 살기 어렵다고 탓할 게 아니라, 더 좋아진 게 뭐가 있나 찾아봐야지. 예나지금이나 모진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부지런함이야.”

용궁시장에서 살 수 있는 건 생선만이 아니다. 이야기를 잔뜩 머금은 세월이 있고, 그것을 고스란히 품은 사람들이 있다.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아지매’가 생선을 손질하는 동안 넌지시 흥정을 걸어 봐도 좋을 듯싶다. 어쩌면 준비해 간 장바구니에 생선 대신 간이 적당히 든 이야기를 가득 실어오게 될지도 모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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