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 - 9

▲ 만해 한용운이 심은 안심료 앞의 세 그루 황금공작측백.
지난 달 오대산에 갔을 때, 붉디붉은 단풍이 산하를 가득 메운 풍경을 보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이라는 말은 정말 이럴 때 써야 하는 가보다…… 싶었습니다. 이런 가을도 끝물이라 붉은 잎을 떨어뜨릴 일만 남았지만 다솔사에는 아직까지 만추(晩秋)의 여운이 남아 있습니다(이 글이 실릴 즈음에는 그마저도 털어버렸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드네요). 그래서인지 팔도에서 온 관광버스가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요, 다솔사라는 이름처럼 신도들을 거느리는 것 같아 살짝 웃기도 했습니다.

다솔(多率)이란 사명(寺名)은 절에 소나무가 많아서라는 설과 다솔사의 주산(主山)인 봉명산이 마치 대장군(大將軍)처럼 앉아서 부하들을 가솔처럼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체로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고 있는데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중건비(重建卑)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비문을 대충 해석해놓은 글귀를 보니 다솔사의 역사는 무려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과는 다소 상이합니다. 지증왕 4년(503)에 영악사(靈嶽寺)로 처음 세워졌고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에 의해 타솔사(陀率寺)라 개칭합니다. 그러다가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뀌고, 다시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타솔사로 되돌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다솔사(多率寺)란 명칭은 19세기 이후로 쓰였다고 하네요.

이렇게 유서 깊은 사찰은 과거의 역사를 보듬고 있기 마련입니다. 당시의 풍경을 상상해보면, 대웅전(大雄殿)에는 효당 최범술이 주지스님으로 있고 응진전(應眞殿)에선 만해 한용운이 독립기념서 초안을 쓰기에 여념 없습니다. 요사채인 안심료(安心寮)의 세 번째 방에 머물던 김동리는 낮에는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고 밤에는 『황토기』 『찔레꽃』 등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그들에게 효당 스님은 직접 덖어 만든 따뜻한 차를 대접하곤 했겠죠.

▲ 한용운과 김동리가 머물렀던 안심료.
아 참, 많은 사람들이 『등신불』을 이 곳에서 썼다고 알고 있는데요, 사실과 다릅니다. 김동리가 다솔사에 머문 건 1936년부터 1940년까지 4년간이었으며, 등신불은 나중에 사상계 1961년 11월호에 처음 발표했습니다. 그렇다고 전혀 무관한 것도 아닌데요, 과거 다솔사에는 소신대(燒身臺)가 있었고 소신한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그리고 한용운이 다솔사에 머물 때 김범부, 최범술과 함께 나눈 소신공양에 관한 논의를 듣고 꽤나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그것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거죠.

고은 시인이 다솔사를 찾았던 이유는 대체로 효당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다솔사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하죠. 독립운동 하느라 투옥되고 이런저런 일로 수시로 옥살이를 하는 통에 구치소로 가서 보는 게 쉬웠을 테니까요. 실제로 그의 자전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에 다솔사의 최범술은 옥고를 치르느라 보기 어려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문득 ‘다솔사의 최범술’에서 다솔사가 적멸보궁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요,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은 법당에 불상이 없는 대신 그 자리에는 창을 만들어 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솔사도 마찬가지로 열린 창을 통해서 사리탑도 볼 수 있지만 더불어서 대웅전에 와불(臥佛)이 있다는 것도 이색적입니다. 부처님께서 앉아계시면 창밖으로 사리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누우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 진신사리탑을 돌며 기도하는 사람들
기록을 보니 1978년에 대웅전의 삼존불상에 금칠을 다시 하던 중 후불탱화 속에서 108과의 사리가 발견돼 적멸보궁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선덕여왕 때 중창에 나섰던 분이 자장율사임을 감안해 부처의 진신사리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효당 최범술(崔凡述)이 숨겨둔 건 아닐까……하는 상상도 해보게 됩니다. 해인사 주지스님이었던 효당 스님은 일본 유학시절 인도승에게서 불사리(佛舍利) 3과를 받아 범어사에 기증하고 탑에 봉안했는데요, 사실은 3과만 범어사에 기증하고 108과는 그가 처음 출가했고 주지로 있었던 다솔사에 몰래 숨기지 않았을까 하는 아주 속된 상상 말입니다.

▲ 다솔사의 차문화 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대양루.
아 이거 참, 갑자기 별 시답잖은 망상이 꼬리를 물고 날개를 치기 시작하네요. 다솔사는 차가 유명해서 茶率寺로 알고 있는 경우도 많은데요, 지금의 적멸보궁 위에 효당 스님이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위해 애써 가꿨을 차밭이 옹기종기 모여 있습니다. 차향이 가득한 산사에 어느 날 회갑을 맞은 만해 스님을 위해 잔치가 열렸죠. ‘거나하게 취해 엉뚱한 주역풀이로 조선은 곧 해방된다’고 외쳤을 때, 이어지는 말이 “다선일여는 무슨, 주선일여(酒禪一如)다!”였으면 정말 웃겼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만해 스님은 회갑을 기념해 최범술, 김범부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함께 자신이 머물던 안심료 앞에 세 그루의 나무를 심는데요, 황금빛 잎사귀를 반짝이는 황금공작편백입니다. 전란에 무너지고 동란에 불타 이제 과거의 흔적은 아스라이 희미해졌지만, 이 세 그루의 나무만큼은 74년 전 그 때 그 사람들의 우정과 충정을 자양분 삼아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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