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愛 빠질 만한 이야기 - 9
다솔(多率)이란 사명(寺名)은 절에 소나무가 많아서라는 설과 다솔사의 주산(主山)인 봉명산이 마치 대장군(大將軍)처럼 앉아서 부하들을 가솔처럼 거느리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대체로 후자에 좀 더 무게가 실리고 있는데 숙종 30년(1704)에 세워진 중건비(重建卑)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진 않습니다.
비문을 대충 해석해놓은 글귀를 보니 다솔사의 역사는 무려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인터넷 백과사전의 내용과는 다소 상이합니다. 지증왕 4년(503)에 영악사(靈嶽寺)로 처음 세워졌고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에 의해 타솔사(陀率寺)라 개칭합니다. 그러다가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에 의해 영봉사(靈鳳寺)로 바뀌고, 다시 신라 말기 도선국사가 타솔사로 되돌렸다고 합니다. 지금의 다솔사(多率寺)란 명칭은 19세기 이후로 쓰였다고 하네요.
이렇게 유서 깊은 사찰은 과거의 역사를 보듬고 있기 마련입니다. 당시의 풍경을 상상해보면, 대웅전(大雄殿)에는 효당 최범술이 주지스님으로 있고 응진전(應眞殿)에선 만해 한용운이 독립기념서 초안을 쓰기에 여념 없습니다. 요사채인 안심료(安心寮)의 세 번째 방에 머물던 김동리는 낮에는 농촌계몽운동에 나서고 밤에는 『황토기』 『찔레꽃』 등을 열심히 쓰고 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그들에게 효당 스님은 직접 덖어 만든 따뜻한 차를 대접하곤 했겠죠.
고은 시인이 다솔사를 찾았던 이유는 대체로 효당 스님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다솔사에서는 거의 보지 못했다고 하죠. 독립운동 하느라 투옥되고 이런저런 일로 수시로 옥살이를 하는 통에 구치소로 가서 보는 게 쉬웠을 테니까요. 실제로 그의 자전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에 다솔사의 최범술은 옥고를 치르느라 보기 어려웠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문득 ‘다솔사의 최범술’에서 다솔사가 적멸보궁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는데요, 일반적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적멸보궁은 법당에 불상이 없는 대신 그 자리에는 창을 만들어 사리탑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다솔사도 마찬가지로 열린 창을 통해서 사리탑도 볼 수 있지만 더불어서 대웅전에 와불(臥佛)이 있다는 것도 이색적입니다. 부처님께서 앉아계시면 창밖으로 사리탑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누우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만해 스님은 회갑을 기념해 최범술, 김범부 그리고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과 함께 자신이 머물던 안심료 앞에 세 그루의 나무를 심는데요, 황금빛 잎사귀를 반짝이는 황금공작편백입니다. 전란에 무너지고 동란에 불타 이제 과거의 흔적은 아스라이 희미해졌지만, 이 세 그루의 나무만큼은 74년 전 그 때 그 사람들의 우정과 충정을 자양분 삼아 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