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6) 도자기 빚는 마을이장 김영태 씨

▲ 도예가 겸 마을이장 김영태 씨.

 ‘자연이 살아 있는 청정마을’, ‘다슬기 화석 마을’, ‘전통주 체험마을’, ‘구전자원 소득화 시범마을’, ‘호박 명품화 마을’. 다양한 수식어가 붙는 이곳은 사천시 곤명면 성방마을이다. 성방마을은 진양호 상류 상수원보호구역과 수변구역을 끼고 있어 각종 개발과 거리가 먼 곳이다. 반면 유구한 역사 속에 나름의 문화색을 갖췄으니, 자연과 사람 어느 곳에나 그 흔적이 배었다.

어쩌면 그저 그런 여느 농촌 마을로 보일 수 있음에도 이 마을 본래의 멋과 향기를 일깨워낸 사람이 있으니, 도예가이자 마을이장인 단산(丹山) 김영태(51) 씨다.

그의 고향은 합천 삼가. 하지만 부산에서 주로 자랐다. 부산공예고등학교(현 부산디자인고교)에서 도예와 인연을 맺었고, 경성대 공예학과로 진학해 배움을 이어갔다. 대학 졸업 후 병원에서 직업재활치료사로 일하던 그는 도예가의 꿈을 포기할 수 없었고 결국 귀촌을 결심했다. 그리고 터를 잡은 곳이 곤명면 성방마을 딱밭골이다. 1996년, 그의 나이 서른넷 때의 일이다.

▲ 김 씨가 성방마을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에 자리 잡고 싶었죠. 당시엔 하동 백련리가 유명했는데, 알고 보니 사천에도 가마터가 꽤 많더라고요. 특히 인근 곤양면 포곡마을은 분청그릇과 관련해선 우리나라 기준점이 되는 곳이어서 사천 성방마을을 택했습니다.”

귀촌 초기, 김 씨는 스스로 “도자기만 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도예에 열심이었다. 특히 성방마을은 물론 곤양면, 축동면 등 사천 일대를 돌며 도요지를 발굴해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했다. 그렇게 도요지 30여 곳과 50여 기의 가마터를 찾아냈고, 이를 8권의 자료집에 담았다.

“그땐 정말 열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틈만 나면 괭이를 메고 산을 넘고 산기슭을 헤맸죠. 문화재나 마찬가지인 도요지가 널렸지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이를 널리 알리고 싶었습니다. 마음만큼 잘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여러 가지 시련도 있었고...”

2003년, 도자기 빚고 도요지 발굴하는 일에 푹 빠져 있던 그를 자극하는 일이 생겼다. 어느 사업가가 성방마을 한 곳을 채석장으로 개발하겠다는 사업계획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김 씨는 평소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꺼냈다. 채석장 사업부지 일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도요지가 많으며, 심지어 석관묘와 석곽묘 등 문화재급 유적도 여러 개 있음을 강조했다.

▲ 축동 반룡진 등 사천 곳곳에서 수집한 도편들.

하지만 사업가도 끈질겼다. 각종 보상금과 개발이익을 내세워 주민들을 선동했고, 그 결과 상당수 주민들이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이 과정에 있었을 갈등과 마음고생은 헤아려 짐작됨이다. 그럼에도 김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행정에선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했고 언론과 시민사회의 관심이 더해지면서 채석장 개발 사업은 백지화 됐다.

2006년엔 ‘조선 막사발 가마터 복원사업’을 둘러싼 갈등으로 홍역을 치렀다. 정부 예산이 투입되는 이 사업과 관련해 사업대상지를 어디로 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던 것인데, 김 씨는 “충분한 역사 고증 없이 역사 왜곡만 이뤄지고 있다”며 비판했다. 무엇보다 도예인들 사이에도 낯을 붉혀야 했기에 피곤함이 컸다고 회상했다.

2009년에는 채석장 개발을 둘러싼 갈등이 다시 한 번 재현됐다. 또 다른 사업가가 마을 맨 안쪽 골짜기, 낙남정맥 주능선 인근에 채석장을 짓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지쳤던 김 씨는 ‘마을을 떠날까’ 고민했다.

“힘들었습니다. 개발업자와 행정이 손발 맞춰 들어오면 사실 막아내기 힘들잖습니까? 젊은 시기에 도예 공부에 더 주력해야 하는데, 엉뚱한 일로 시간을 소비해야 하는 상황도 싫었습니다. 그 과정에 느끼게 될 사람에 대한 배신감도 두려운 일이었고요. 그래서 ‘이사를 가버릴까’ 생각도 했는데, 집사람이 ‘이번에도 꼭 막아내야 한다’고 열성이어서 마음을 다시 먹었습니다.”

그는 ‘마을을 지켜야 된다’는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모았다. 2003년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는지 이전보다 말이 잘 먹혔단다. 당시 마을에는 친환경농사를 짓는 주민도 상당수 있어, 이들의 참여도 힘이 됐다. 그는 집요한 개발업자의 대응에 맞서 성방마을이 진양호 상류지역으로서 생태적으로 건강하고 보존가치가 높은 곳임을 강조했다. 이 과정에 수달과 수리부엉이 등 멸종위기종과 천연기념물의 흔적도 찾아내 언론에 알렸다.

이 대목에서 김 씨의 아내 이은주(49) 씨가 살짝 끼어들었다.

“사업하는 사람들 진짜 집요합니다. 올해 4월까지도 우릴 찾아와서 채석장 가능성을 묻더라고요. 그런데 얼마 전 그 터 진입로 일부가 팔렸어요. 지금으로선 사업을 포기한 것 아닌가 싶은데, 이제야 안심이 됩니다.”

김 씨는 두 번째 채석장 반대 운동을 펼치던 2009년 8월 무렵, 마을이장을 맡았다. 그동안 행정과 주로 갈등했던 관계였다면, 이때부턴 협조하고 협력해야 할 동반자 관계로 바뀐 셈이었다.

“이장을 맡으면서 행정이나 공무원들의 사정도 조금은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마을에서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려면 행정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힘듭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죠. 그들에게 마을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도움을 이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인 것 같습니다.”

그는 채석장 논란 속에 발로 뛰며 확인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엮어 성방마을을 홍보하는 이야기로 탈바꿈시켰다. 이 과정에 문화재청 전문위원과 관계 공무원들이 수없이 마을을 다녀갔다. 그 결과 앞서 언급한 다슬기마을, 전통주마을, 구전자원마을, 호박마을 등등의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그리고 최근엔 새로운 수식어 하나를 준비 중이다. 바로 ‘기록사랑마을’이다. 김 씨는 마을회관에 쌓여 있던 1959~1967년 사이 각종 행정서류가 당시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고 보고 국가기록원에서 주관하는 ‘기록사랑마을’ 지정을 신청한 상태다. 현재 전시관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다.

3년 전부턴 농사일도 배운다. 이장을 맡으며 각종 마을일에 신경을 쓰다 보니 도예가로서 시간 쓰기가 쉽지 않은 상황. 당연히 먹고사는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시작한 농사일. 애호박과 대추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다. “아직 실수가 많다”며 웃음 짓는 그는 “전문 농사꾼들의 경험과 지식을 하루빨리 배우는 게 단기 목표”라고 밝혔다.

그러나 속마음은 역시 도예 일에 열중하는 것이다.

“우리 마을이 시골스럽게 잘 가꿔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나도 본업으로 돌아가야 하고요. 옛 기법을 계승해 발전시키는 일과 우리 지역 도요지를 답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계속 하고 싶습니다.”

그는 농사일 짬짬이 시간을 아껴 도예전도 준비했다. 그의 도예 인생 35주년 기념전이다. 백자에 청자를 일부 넣는 시도를 했다고 하니 새로운 볼거리가 되겠다. 이 도예전은 경남문화예술회관 제2전시실에서 28일 시작해 12월 2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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