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 愛 빠질 만한 이야기 - 8

▲ 다솔사 전경.

대한민국의 명승지 여행은 곧 사찰여행입니다. 전국의 풍광 좋은 곳에는 모두 사찰이 있으니까요. 옛날에는 치성을 드리는 마음으로 힘들게 산에 올랐겠지만 자동차가 주요 교통수단이 된 이후 입구 또는 근처까지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도로가 놓여 있습니다. 손쉽게 산천 경계 좋은 곳에서 경치 감상도 하고 산의 정기를 받아 공을 들이고 있으니 정말 편한 세상입니다. 이렇게 다니다보면 어지간한 유명 사찰은 다 가보게 되는데요, 사람이 모이는 곳이 번잡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나이가 들면서 슬그머니 고적한 곳을 더 좋아하게 되더군요. 그런 차에 정말 마음에 쏙 들어오는 곳을 찾았으니 바로 곤양의 다솔사(多率寺)입니다.

다솔사란 곳을 처음 접한 것은 ‘산하의 시인’이라고 부르는 고은 선생이 경향신문에 연재하던 자전소설 『나의 山河 나의 삶』에서입니다(여기에서 식민지 시절에 대한 글만 추려 출간한 책이 『나, 高銀』이며, 60년대를 따로 모은 것이 『나의 청동시대』입니다).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만 되면 반드시 언급되는 대작가의 글에서 수시로 언급되는데다가, 그보다는 이름이 참 예뻐서 언젠가는 꼭 한 번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 이내 잊었는데 사천으로 이사 온 후에야 바로 그곳임을 알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았네요.

▲ 다솔사를 향해 오르는 숲길.

처음 방문했을 때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나무들 사이로 오롯한 산길이 있고, 하늘에서는 햇살이 부서져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가슴 속 깊숙이 파고드는 새파란 공기와 지저귀는 새 소리가 마치 모차르트 같았던 것도 기억납니다. 그리고 갑자기 펼쳐진 커다란 주차장에 다소 뜬금없는 기분도 들었고, 대찰이라 그러려니 했다가 넓은 주차장과 묘하게 불협화음을 이루는 소담한 법당들을 보며 반전의 묘미도 느꼈습니다. 무엇보다 고은 시인이 책에서 표현했던 감상이 온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가장 좋았네요.

“정작 다솔사는 다솔사역에서 멀다. 그 먼 산길을 터벅터벅 올라가면 퇴락할 대로 퇴락한 고찰(古刹)이 있는데 그것이 다솔사이다. 식민지시대 후기 해인사의 똑똑한 중이었던 최범술(崔凡述)이 이곳을 주름잡아 차를 재배하여 다선일여(茶禪一如)를 운운하던 차에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의 회갑연을 여기서 베풀기도 한 것이다. 만해가 한잔 축배를 받아 거나해지자 엉뚱한 주역풀이로 조선은 곧 해방된다고 말한 것도 여기이다. ……중략…… 나는 다솔사에서 하룻밤을 잤다. 지난날 젊은 시절의 김동리(金東里)가 그의 친형인 범부(凡父)의 음덕으로 이곳과 해인사 일대를 떠돌며 여기서 하동 화개까지 나아가 그의 소설 『역마(驛馬』의 무대를 설정한 것이다.”

다솔사역, 먼 산길, 퇴락, 최범술, 한용운, 김동리 등 고은 시인의 몇 줄 되지 않는 짧은 글에서 왜 이렇게나 많은 생각이 떠오르는 걸까요. 다솔사에 관한 이야기하고 싶었으니, 그럼 고은 시인의 글을 이정표삼아 한 번 움직여보겠습니다.

▲ 효당 최범술이 가꿨을 차밭.

다솔사에서 멀다던 다솔사역은 1968년부터 2007년까지 40년간 제 기능을 했습니다. 한 지역의 발전은 유동인구가 많은 곳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마련이라 역사(驛舍)가 구심점이 되는 건 당연했습니다. 곤명면사무소가 1km도 되지 않는 거리에 있는 걸로 보아 과거에는 다솔사역도 그러했을 테지만 폐역(廢驛)된지 6년이 지난 지금은 인적마저 드문 황량한 곳입니다. 가끔 화물열차가 지나가면서 ‘나 아직 죽지 않았다’를 외치는 느낌이긴 한데요, 그렇다고 재개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폐선된 것도 아니라서 레일바이크라든지 다른 용도로 활용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도 전국에 8개 밖에 없는 사찰이름을 가진 기차역(다솔사, 불국사, 직지사, 백양사, 개태사, 희방사, 성주사, 흥국사)인데, 이런 걸 희소가치로 두고 어떻게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요? 뭐, 없으리란 것도 알지만 아쉬운 마음에 해보는 소리입니다.

▲ 다솔사역을 홀로 지키고 있는 나무 한 그루.

그 먼 산길’을 걸었던 고은 시인의 길도 지금은 잘 닦인 포장도로로 변해 옛 모습을 찾기 어렵습니다. 포병대대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이 ‘3보 이상 승차’라고 하는데 이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표현이겠죠. 절을 찾는 사람들을 위해 정말 잘 닦아놨습니다. 다만 왜 사찰의 턱밑까지 주차장으로 만들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규모가 커지면 이 자리에 템플스테이용 건물이 들어설라나요? 그때는 또 그렇게 활용하더라도 호젓한 산길을 걸어 올라갈 수 있도록 했으면 더욱 좋았을 겁니다. 단순히 걷는데 지나지 않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올레길, 둘레길을 찾는 건 걷는다는 행위자체로 인간의 정서에 다가설 수 있어서입니다. 측백나무, 삼나무, 소나무가 원시림처럼 펼쳐진 고즈넉한 길은 차로 달리고 마는 건 그 정서를 포기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죠.

▲ 해우소 가는 길에 펼쳐진 화사한 단풍.

당시의 고은 시인은 인적 드문 오솔길을 따라 산을 올랐을 겁니다. 다섯 번이나 중창한 대찰이 전란 등 화재로 소실돼 과거의 영화는 흔적만 남았을 터이니 시인의 감성은 얼마나 안타까웠을까요. ‘퇴락할 대로 퇴락한 고찰’이란 표현은 바로 그 심정을 담은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다솔사에 오를 때마다 세월이 전하는 현장감과 무게감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기와 한 장에도 참으로 많은 사연이 숨어있네요.

세상에서 제일 나쁜 게 한창 흥이 오를 때 판을 깨는 거라고 했나요? 연재글로 따지면 절단마공일 텐데, 내용이 좀 길어서 돌 맞더라도 일단 자르고 봐야겠습니다.
또다시 투 비 컨티뉴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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