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선한 작가의 사천.삼천포 愛 빠질 만한 이야기 - 6

 

▲ 조명군총

전국 초등학교마다 반드시 세워져 있는 동상이 있으니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입니다. 물론 한글창제의 세종대왕과 현모양처의 대명사 신사임당도 빼놓을 수 없죠. 이 외에도 책 읽는 소녀와 유관순 누나 그리고 반공교육의 산물인 이승복 동상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동상의 건립 목적은 위대한 선열의 얼을 기리고 호연지기를 함양하자 뭐 이런 정도일 텐데, 이순신 장군의 업적을 생각하면 학교마다 세워도 모자람이 없을 것 같긴 합니다.

한편으로는 이 장군께서 너무 혹사를 당하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전국의 학교 마당에 서서 아이들을 지키는 것도 부족해 전 지역을 누비며 각종 축제에 찬조출연을 하시는데, 그야말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입니다. 생일상을 챙기러 서울 남산골에 들렀다가 제사상을 받으러 아산 현충사로 갑니다. 여기에 거제, 통영, 부산, 여수, 해남 등 삼도를 누비며 펼쳤던 해전지역도 순례해야 하고, 삭탈관직당해 걸어야만 했던 백의종군로를 따라 내륙지역의 시군도 방문해야 합니다. 전국에 흔적을 남기지 않은 곳이 드물 지경인데, 그럼 남해를 면한 사천지역에는 흔적이 없을까요? 당연히 있습니다. 바로 사천해전(泗川海戰)입니다.

사천해전과 관련한 키워드는 두 가지로 ‘최초’ 그리고 ‘선진리성’입니다. 먼저 최초라는 단어는 참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요, 충무공 이순신하면 당연히 떠오르는 것이 거북선이며 최초 출격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벌어진 현장이 바로 사천해전입니다. 마치 영화처럼 최신무기로 적을 물리치는 굉장한 장면이 연출된 건데요, 현실은 어떨까요? 최초라는 이름은 당포해전에 빼앗기고 선진리성은 역사 왜곡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거북선이 등장한 최초의 해전승첩지하면 국정 교과서에서 조차 당포해전이라고 되어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역사적 관례에 따라 당포해전과 사천해전을 묶어 통칭한다고 하지만 1592년 5월 29일에 벌어진 사천해전

▲ 선진리성 아래 해안길

과 6월 2일에 벌어진 당포해전을 함께 묶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어쩌면 이순신 장군이 조정에 올린 장계 <당포파왜병장(唐浦波倭兵狀)>이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이는 사천해전과 당포해전의 전공을 함께 보고하기 위함이었지 그 의미까지 포함한 것은 아닙니다.

사료에 따르면 이 충무공은 사천해전에서 처음 거북선을 출격시켜 13척의 왜선을 격침시켰으며, 이 전투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총상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뒤로 미루고, 대체 이 영귀선(靈龜船)이라고 불렀던 거북선이 왜 여기에, 어디에 숨겨두고 있었을까요? 여기에서 살펴봐야 할 것이 바로 선진리성입니다. 과거 선진리 지역에는 지역주민들이 쌓은 토성이 있었습니다.

선진리 토성은 남해에서 서해로 가는 길목에서 보급을 맡은 군사요충지로, 예전에는 세금을 거둬들이던 조세창이었습니다. 그 기록은 고려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고려사(高麗史) 식화지(食貨志) 조운조(漕運條)에 따르면 개경 이남에는 조세를 거둬 배로 운반하던 12조창이 있었고 그 중 하나가 통양포(通陽浦), 현재 선진리 토성 자리입니다. 나라의 세곡이 집결하는 곳인데 그냥 둘 수는 없죠. 따라서 조창에는 반드시 창성(倉城)을 축조해 만전을 기했습니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와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與地勝覽)에도 마찬가지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선진리성 관광안내판에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74호-임진왜란 때 왜군(倭軍)이 거점을 마련하기 위해 쌓은 일본식 성곽”이라고 되어 있고, 인터넷 백과사전에도 [사천 선진리왜성(泗川船津里倭城): 1597년(선조 30) 왜군(倭軍)이 축조한 성]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역 주민들이 세운 성이 아니라 왜구가 세운 전초기지라는 건데, 기존 토성에 석축 몇 개 더 쌓았다는 게 이유입니다.

잘 살고 있던 집에 서까래 몇 개 더 얹었다고 족보가 뒤바뀌었으니 참 통탄할 노릇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벌어진 역사왜곡으로 인해 지금은 마치 부끄러운 과거처럼 인식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의 집단무덤인 조명군총(朝明軍塚)이 있어 패전지역이라는 이미지마저 덧칠되어 버렸습니다.

▲ 선진리성에서 바라본 사천만

이 때문에 역사 유적지에는 당연하다는 듯 있는 역사관도 하나 없습니다. 물론 역사관 자체가 필요한 건 아닙니다. 사실 박물관 또는 유적지에 가보면 전시행태가 거의 비슷합니다. 관련 유물 몇 점, 문화재 몇 점을 진열해놓고 하단에는 빼곡히 설명글을 달아놓고 있으니, 스치듯 살피는 게 전부인 역사관 건립에 세금을 낭비할거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죠.

문제는 역사관의 유무가 아니라, 자랑스러워 할 역사가 왜곡되어버린 탓에 지역민들이 가져야 할 자부심과 자긍심도 흔들린다는 겁니다. <당포파왜병장(唐浦波倭兵狀)>에 거북선이 출격한 최초승전지라는 기록이 분명히 있음에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심지어 왜성이라고 오해까지 사고 있으니 억울하고 통곡할 노릇입니다. 인식개선부터 제대로 해야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기에서 중요한 것인 바로 역사 스토리텔링입니다.

삼국지에서 관우가 독화살에 맞았을 때 마취도 하지 않고 뽑았다고 하죠. 그는 껄껄 웃으면서 바둑을 뒀다고 하는데요, 이 충무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천해전에서 왼쪽 어깨에 총상을 입는데, 그 팔로 전투를 치르고 두 치 깊이로 살을 쪼개 탄환을 꺼내지만 태연스레 웃고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지존의 포스가 작렬하는 장면입니다. 이러한 이 충무공의 영웅적 풍모에 사천해전의 준비 상황, 치열했던 전투 그리고 인간 이순신의 인간미까지 더하고 나면 심장이 두근거리고 애틋함에 눈물을 흘리게 되는 굉장한 이야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요?

▲ 선진리성으로 향하는 벚꽃터널

어린 마음에 모든 아버지는 슈퍼맨이고 대한민국이 세계 최강국이며, 내 고향은 가장 멋지고 행복한 무릉도원입니다. 그것이 자족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하다면 당연히 그렇게 가르쳐야 합니다. 벚꽃이 흐드러진 봄이면 선진리성 일대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데, 그저 꽃구경만 하고 가는 곳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를 간직한 소중한 곳임을 정확히 알고, 또 그렇게 널리 알렸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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