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봉사 실천하는 대한가수협회사천지부장 이미연 씨

“저, 노래는 잘 못해요. 그냥 ‘봉사’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서 분에 넘치는 자리를 맡게 됐죠!”

7년째 대한가수협회사천시지부를 이끌고 있는 분이 노래를 잘 못 부른다고? 믿기지 않았다. 그저 겸손의 말이거니 여겼는데,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더 분명한 말이 돌아왔다.

“노래방 가는 일이 가장 고역이에요. 노래 못 한다고 사양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매번 그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몇 곡 배워보기도 했는데, 역시 잘 안됩니다. 이상하게 귀는 프론데 부르는 것은 영...”

듣는 건 프로급이나 부르는 건 잘 안 된다며 수줍게 웃음 짓는 사람. 노래도 봉사가 될 수 있다는 말에 꽂혀 노래 잘 부르는 이들을 조직하고 노래가 필요한 이들과 맺어 주는 사람. 그녀는 대한가수협회사천시지부장 이미연(47) 씨다.

돌이켜보면 대한가수협회사천시지부의 역사는 짧다. 그럼에도 ‘삼천포아가씨가요제’란 이름의 전국창작가요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크고 작은 지역행사가 있을 때마다 중견가수들을 초청해 공연을 선보이는 것을 보면 존재감은 매우 또렷하다. 그 한가운데 이 씨가 자리하고 있음이다.

<고향의 노래> 음반 발매 소감을 밝히는 이미연 지부장
그녀는 무슨 마음으로 ‘노래를 통한 봉사’를 시작했을까? 그녀에게 사천, 삼천포는 어떤 인연일까? 그녀의 삶이 사뭇 궁금하다.

이 씨는 1967년 선구동에서 2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운수업을 하던 아버지 덕에 유년시절은 비교적 윤택했다. 그러나 이 씨가 초등학교(삼천포초) 4학년이던 해,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었고, 그녀는 외가가 있던 고성군 하이면으로 옮겨 초등학교(하이초)를 마쳐야 했다.

청소년기는 김해에서 보냈다. 아버지를 따라 꽃을 가꾸던 일은 지금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그러던 중 또 한 번 시련이 닥쳤다. 뇌졸중으로 인한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이 씨는 충격에서 쉬이 벗어나지 못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환경을 바꿔보라”는 주변 권유에 따라 일본 유학을 택했다. 일본에는 삼촌과 언니가 살고 있었다.

일본생활은 그녀에게 큰 변화였다. 또한 기회였다. 대학 2학년 시절, 무심코 시작한 아르바이트가 곧장 직업으로 굳었다. 일본 국내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포함한 아시아를 무대로 골프장을 설계하는 업체에서 대학 졸업 전부터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직업 특성상 그녀는 여러 나라를 다녔고, 이 과정에 무역업에도 눈을 떠 작은 회사를 차리기도 했다. 일본에서의 20대, 30대 시절은 이 씨에게 도전의 연속이었고 ‘성공’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결과를 낳았다.

그 시절, 이 씨는 고향에 있는 어머니를 생각하며 틈틈이 봉사활동을 했다. 주로 홀로 사는 노인들의 가정을 방문해 정을 나눴다. 그러면서 봉사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인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이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깨달았다.

“일본사람들은 뭔가를 받으면 꼭 답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랜 풍습이죠. 그런데 별로 내어 줄 것도 없는 사람이 무언가를 자꾸 받는다면, 이는 참 고역입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큰 상처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녀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하네다공항에서 자원봉사 했던 기억을 매우 자랑스러워했다. 사천공항처럼 국내선만 다니던 하네다공항에 국제선 정기노선이 만들어지는 데 그녀가 일조했기 때문이다.

이야기인 즉,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그해 6월, 한국 김포공항을 오가는 임시 국제노선이 하네다공항에 만들어지자 통역을 겸한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그녀는 직원과 다른 자원봉사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고, 한국어 안내방송도 맡았다. 각종 표지판의 한국어 표기도 제안했고, 심지어 하네다공항을 홍보하는 각종 활동에도 최선을 다했다.

가수협회는 지역을 알리고,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삼천포아가씨 가요제를 열고 있다.
누가 봐도 자원봉사 그 이상의 열정이었다. 이를 눈여겨보던 일본 최대공영방송사 NHK의 한 기자가 이 씨를 인터뷰했고, 이 과정에 하네다공항에 국제선이 취항한다는 소식까지 널리 퍼졌다.

“하네다공항에서 도쿄까지는 ‘20분 거리’인데도 당시엔 이용률이 매우 낮았나봅니다. 그런데 그날 방송 이후 이용객이 꽤 늘었고, 하루 3편 운항하던 하네다-김포 노선이 8편으로 늘었어요. 외국인에 대한 편견도 줄어들어, 하네다공항에 외국인을 채용하는 계기도 됐다고 들었습니다.”

이후 하네다공항은 국제공항으로 발돋움했고, 지난 2011년엔 청사를 새로 지었다. 이 씨는 청사 개청식에 초대 받는 영광도 누렸다.

그녀가 한국으로 돌아오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어머니 때문이었다. 30살 젊은 나이에 위암과 싸워야 했던 그녀. 이를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어머니는 늘 노심초사 했을 터다. 당시의 기억을 무거운 짐으로 가졌던 이 씨는 고민 끝에 2006년 일본 삶을 정리했다.

이 씨는 부산에서 1년을 보낸 뒤 2007년에 어머니가 있는 고성군 하이면으로 돌아왔다. 오빠와 함께 식당을 개업한 그녀는 일본에서 했던 것처럼 봉사활동에도 여념이 없었다. 특히 호적상으론 가족이 있지만 실제론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노인들, 일종의 복지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을 소리 없이 도왔다. 자신이 졸업한 하이초등학교에는 장학금도 기탁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누군가를 도울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하며 바삐 지내던 어느 날,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녀를 찾았고, 그들은 대한가수협회사천시지부의 대표를 맡아줄 것을 제안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죠. 고향에 돌아온 지 몇 개월 안 되는 데다 가수라는 게 저랑 어울리지 않거든요. 몇 번을 고사했는데, 노래도 봉사의 하나라는 말에 용기를 냈습니다. 노래 잘하는 분들이 활동할 수 있게 도우면 되겠더라고요.”

그해 11월, 가수협회사천지부를 창립했다. 그리고 <다솔사 가는 길> <실안연가> 등 사천의 향이 묻어나는 창작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노래들은 ‘실안창작가요제’를 통해 소개됐고, 올해 <고향의 음반>으로 출시됐다. 실안창작가요제는 2011년부터 ‘삼천포아가씨가요제’로 탈바꿈해 신인가수들의 등용문 역할을 하고 있다. 가수협회는 또한 매년 한두 차례 ‘찾아가는 가요무대’란 이름으로 음악과 노래가 필요한 시설이나 단체를 찾아가고, 거리공연을 통해 지역민들의 문화적 공허함을 달래고 있다.

“회원이 60여 명 되는데, 가수와 봉사가수, 봉사회원으로 구분이 돼 있어요. ‘내 재능을 사회에 기부하겠다’ 이런 뜻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반면 이 활동으로 이익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철저히 배제됩니다.”

이 씨는 지부장답게 가수협회사천지부에 대한 자랑을 한바탕 늘어놓았다. 그러나 오늘은 ‘인간 이미연’에 초점을 맞춘 만큼 그 얘기는 다음으로 돌린다. 다만 가수협회 활동 과정에서 평생을 함께할 소중한 인연을 만났다는 사실은 밝혀둬야겠다. 매사에 성실하고 삶의 지향점도 많이 닮았다고 느낀 그녀는 당시 가수협회사천지부의 사무장을 맡고 있던 김삼문(50) 씨와 2010년 결혼했다. 남편 김 씨는 현재 대한가수협회 서부경남지부장을 맡고 있다.

알고 보면 이 씨의 삶의 원천은 어머니다. 단지 그녀를 낳았기 때문이 아니라, 보고 자라며 몸과 마음에 당신의 흔적이 쌓였다는 표현이 맞을 게다. 올해 여든아홉의 김복점 여사. 이 씨는 어머니를 “영원한 나의 스승”이라 불렀다. 그만큼 어머니에게서 남을 위해 ‘베풀며 사는 삶’을 어릴 적부터 배워 온 것이다.

“가수협회 창립하던 날 이른 새벽, 잠을 설치던 나를 일으켜 놓고 복주머니 건네던 일을 잊지 못해요. 주머니 안엔 180만 원이 들어 있었는데, 알고 보니 농사 인건비였죠. 지금도 마음이 흔들릴 땐 그때를 생각하곤 해요.”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진정성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이미연 씨. 훗날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의 안식처를 만들고 싶다는 그녀 꿈도 멀지 만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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