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병주가 만난 사람 - 마지막 '대장간' 지키는 김명찬 씨

사천에 몇 남지 않은 대장장이 김명찬(65)
10월의 끝자락. 차가워진 공기만큼 하루해도 짧다. 장작불이 그리울 수도 있는 시간, ‘각산공작소’라 적힌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간판 귀퉁이에 조그맣게 자리 잡은 글씨는 ‘대장간’. 여기가 바로 ‘내가 찾던 그곳’이었다.

대방동 각산사거리에서 삼천포대교를 향하는 길가. 슬레이트 지붕의 나지막한 건물 입구에 서니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땅 땅’ 하는 소리만 귀를 때렸다. 어둑한 건물 안을 흘깃 봤다. 벌건 숯불이 이글거리는 가운데 망치질에 여념 없는 한 사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사천에 몇 남지 않은 대장장이 김명찬(65) 씨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이야기가 궁금해서 들으려 왔습니다!”
“허허, 이렇게 사는 사람 뭐가 궁금해서 왔을꼬!”


김 씨의 표정이 밝다. 다행이었다. 어떤 분야건 ‘뭘 좀 한다’는 사람은 뻣뻣한 경우가 많은데, 갑작스런 방문객을 스스럼없이 받아주었다.

그는 칼을 만들고 있었다. 화덕에 숯불을 피워 놓고 그곳에서 달궈진 칼 형태의 쇳덩이를 꺼내 모루(다듬질과 벼름질 등 대부분의 작업이 이뤄지는 대로, 그는 ‘몰’이라 불렀다.) 위에서 두들기고 있었던 것이다. 불에 달구고 망치로 두들기기를 계속할 때마다 쇳덩이에서는 검은 무언가가 떨어져 나왔다.

“옛날 사람들은 이런 작업을 백 번은 넘게 했을 겁니다. 많이 두들길수록 불순물이 빠져나오면서 강도가 높아지고 질기게 되는 거죠. 그래도 뭐니 뭐니 해도 쇠를 다룰 땐 담금질이 제일 중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금이 가 망치게 되는데, 날의 위는 강하고 아래는 물러야 안 부러집니다. 사람 사는 법도 이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김 씨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때론 화덕의 불씨를 뒤집고, 때론 불무(=풀무)의 바람세기를 조절하고, 쇠를 두들겼다. 그러는 동안 이야기는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그는 삼천포초등학교 44회 졸업생이었다. 그리곤 더 공부하지 못했다. 적어도 학교 공부는. 대신 아버지의 뜻을 따라 기술을 익혔다.

“옛날엔 대장간이 부둣가에 있었는데, 당시 아버지는 기술이 최고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생활에 여유가 좀 있는 편이었는데도 공부를 안 시켰거든. 그래서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하던 불무질을 졸업하고도 계속 하게 됐지요.”

그러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그렇게 강조하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다. 김 씨 나이 17세.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대장간 일을 접어두고 큰 도시로 떠났다. 그리곤 철공소 등에서 기술을 더 익혔다. 그러던 중 아내 이미임(64살) 씨를 만나 결혼했고, 1987년부터 대장간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야기 도중 외출 나갔던 김 씨의 아내가 가게로 들어섰다. 몇 마디 나누지 않은 짧은 대화였음에도 부부의 금슬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서로 배려하고 아끼는 마음이 대화에 묻어났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살림집으로 옮겨가자 김 씨는 곧 아내 자랑을 늘어놨다.

“내가 집사람 잘 만나 이만큼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 집도, 가게도 예전에 아내 권유로 빚내 산 것입니다. 지금껏 집사람에게 돈 벌어오라는 소리 안 했으니, 나도 잘 산 것 아녜요?”

이렇게 말하는 김 씨의 목소리에서 은근히 힘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요즘은 주로 어떤 주문이 들어오고, 어떤 물건들을 만드느냐는 질문을 받고서다.

“요즘은 뭐 별 일 있습니까. 어떤 때는 (일이)좀 있지만 거의 없는 편이에요. 내 집이니까, 세가 안 나가니까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지금 만들고 있는 이 칼도 그냥 노는 김에 만들어 놓는 거죠. 간혹 칼 사러 오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는 대장간 사업이 힘들어진 배경으로 크게 두 가지를 꼽았다. 첫째는 중국산 제품이 싼 가격으로 밀어닥쳤기 때문이고, 둘째는 바다가 오염돼 수산물 생산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란다. 수산업이 호황일 때는 각종 농기구류 외에도 어선에서 필요한 고기잡이 도구 주문도 많이 받았던 그였다.

삼천포 지역경제에 대한 푸념도 빼놓지 않았다.

“옛날 고기 많이 잡힐 땐 인구도 많고, 특히 쥐고기(=쥐치) 날 땐 칼을 엄청 팔았지요. 이젠 인구도 점점 줄고, 내 때 좋은 날 다시 올까 싶어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쯤, 이번엔 김 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시집간 딸 혜정(37살) 씨였다.

“산청 가서 애를 먹였더니 정이 떨어졌는가베? (...) 다음에 비행기축제 할 때 꼭 온나. 내가 구경시켜주께!”

무슨 얘긴가 싶어 물었더니, 얼마 전 끝난 산청한방엑스포에 가족 나들이를 갔다가 김 씨가 길을 잃고 헤맸던 적이 있었단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딸에게 장난을 쳤던 것이다. ‘비행기축제’는 경남사천항공우주엑스포를 뜻했고, 손주들에게 멋진 에어쇼를 구경시키고 싶은 마음을 전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새 일을 멈춘 채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에게 남은 인생에 어떤 목표가 있는지 물었다.
“후배를 길러 일을 넘기는 게 목표지요. 그런데 지금은 까마득해서... 배우려는 사람도 없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이 일에 희망이 없다고 보는 듯해서... 마음 같아선 정부에서 우리처럼 이런 사람들, 기능장으로 뽑아서 재정지원을 좀 해주고 하면 좋겠어요. 그러면 배우려는 사람이 좀 있지 않을까요?”

‘대장장이’ 김 씨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 바깥은 어느새 땅거미가 짙게 내려앉고 있었다. ‘각산공작소’ 아니 ‘대한민국 대장간’의 운명도 어쩌면 저 땅거미와 같겠다는 생각을 했다. 기계화, 산업화, 규모화의 바람은 동네 어귀에 남은 마지막 대장간을 용도폐기 시키기 직전이었다.

어쩌면 이 시대 마지막 대장장이가 될지도 모를 김 씨. 그럼에도 그의 삶이 허무하지만은 않을 테다. 아내를 만나 사랑하고 자식을 길러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그 역시 분명한 이 시대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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