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음악 '베토벤 현악3중주 <세레나데> op 8'

‘한 눈에 반했다’거나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라는 말은 듣기 좋습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이겠지요.

이렇게 사랑에 빠지는 상황은 일단 ‘눈’으로 본 이후의 반응이겠지요.
그런데 눈으로 본 일도 없이 사랑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미가 임신을 확인한 순간부터입니다.

살아가면서 어떤 과정을 마친 후 새롭게 뭔가를 시작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더러 편입생들이 수업 듣는데 이 친구들 열의는 대단합니다. 다른 학생들 놓칠 수도 있는 필기를 꼼꼼히 쓰고 행여 시험에라도 나올까 준비가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결혼한 학생인 경우(저희가 학교 다니던 시절에는 4학년 말까지도 결혼할 수 없게 제도로 묶어두었지요, 참..) 다른 경우보다 더 합니다. 물론 저도 채근하지요, 친정, 시댁 두 가문의 기대가 한 몸에 달려있으니 본인들은 더하겠지만, 특히 ‘남편에게 감사표시 수시로 하라’고 일러줍니다. 아직도 우리나라 남자들 결혼하면 집에 돌아와 ‘부처 손’마냥 신문이나 읽고 자기 보고 싶은 채널 돌려가며 이것저것 심부름시키는 게 대부분이잖아요.

그러던 남편이 아내 공부하러 간 사이 ‘혼자서도 잘 해요.’하며 밥 차려먹고 집안일 살피고 가끔씩은 자기와 분야 다른 공부하는 아내의 전공을 힐끔거리기도 하겠지요. 속으로 대견해하면서 말입니다. 똑똑한 여자가 세상을 바꾸는 원동력이 되겠지요.(저희 학교 표어랍니다.)

봉숭아학당마냥 수업시간에 쪽지 돌리며 시시덕거리는 동갑내기 사진작가가 전시회 개최한다는 소식에 편입해 조신하고도 열심히 공부했던 새댁학생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마지막 학기에 뭔지 가방 한 가득 싸 가지고 수업만 끝나면 냅다 뛰어가던 친구였습니다, 어느 날 슬쩍 들여다 본 가방에 카메라가 들어있었습니다.

“좋은 전시회 있는데 함께 갈래? 혹시 어미노릇에 찌들어있는 건 아냐?”

결혼한 지 제법 된 새댁(아이를 낳지 않은 여인에게 저는 ‘새댁’이라고 한답니다.) 하나가 문득 생각나기에 ‘혹시 그 사이 어미가 되기라도 했어?’ 문자 보냈더니 답이 왔습니다.

“저 애기 가진 줄 어떻게 아셨어요?”

“나처럼 훌륭한 사람은 그냥 감이 잡혀...”

졸지에 족집게 도사가 되었지요.

한여름 알고 모르고 하는 길을 나서면 밖에 가장 많이 보이는 들꽃이 개망초, 그 다음으로 흔하게 눈에 들어오는 꽃이 노란 달맞이꽃이더군요.

올해는 꼼짝 못하고 집에 콕 박혀있느라 시원한 찻길을 지난 적이 없는 듯합니다.

해가 뉘엿해질 무렵 배시시 얼굴 드는 달맞이꽃을 보자면 참 곱고 참해 마음도 착해집니다.

이런 심정을 고스란히 살려내는 음악 뭐 있을까, 조금 생각해보니 떠오릅니다.

베토벤의 초기작품에는 모차르트의 영향이 많다고들 하지요. 저는 잘 모릅니다.

그냥 귀 열고 아름다운 멜로디 듣는 단순한 ‘듣기쟁이’ 정도겠지요.

판소리 이야기하면 빼놓지 않는 손가락에 ‘귀 명창’이 들어갑니다.

이리저리 수준 나눌 정도면 들인 시간과 정성, 그리고 돈이 얼마겠습니까.

소리꾼들이 제일 껄끄러워하는 대상도 바로 이 ‘귀 명창’이겠지요. 현장감 있게 거의 실시간으로 평가해주는 이들에게 자신감 떨어지면 바로 ‘찍혀버리니’ 긴장할 것이고 그래서 안 찍히려고‘ 노력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다보면 모든 사람이 들으며 감탄하겠지요.

절대로 ‘귀 명창’이 될 리 없는 비평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로지’ 들어왔습니다.

그러다 한 곡 걸리면 헛소리 삼아 ‘nice to meet you(너 잘 만났다,)’ 되지도 않는 말로 영어 훼손시키며 머리에 음표가 박힐 때까지 수 년, 수십 년 뭉개지도록 들어왔습니다.

아름다운 곡인데 물러설 수 없잖아요. ‘아산이 무너지나 평택이 깨지나 끝장을 보자’입니다.

십대부터 들어온 베토벤 초기 작품 가운데 한 곡이 두세 개 되는 그의 <세레나데> 가운데 [현악 3중주] 작품 8번이 제게 당첨된 곡입니다.


나이 먹었으니 제가 어려서부터 듣던 연주자는 모두 고인이 되었고, 당연히 그 분들은 전설 속으로 승화했지요.

처음 들었을 때, 가슴을 녹이는 네 번 째 악장에서 숨이 막혔습니다. 매 번 느끼는 거지만

“어떻게 이런 멜로디를 썼담!”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창 감수성 예민한 시기에 이런 음악을 듣다니, 하지만 겨우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그 곡을 ‘속이 시원해질 때까지’ 마냥 들을 수는 결코 없었지요. 많이 따르던 어느 어른의 추모사에 썼다시피 오디오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그 오래 전, 짝사랑에 빠진 듯 헤매던 십대소녀가 바로 저였답니다.

하이페츠의 바이올린, 피아티고르스키의 첼로, 그리고, 그리고 말입니다. 바로 윌리엄 프림로즈, 모두가 비올리스트인 프림로즈 때문입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외국어 공부하며 쌓은 테크닉 하나가 ‘환치시키기’였던 것 같습니다.

프림로즈가 달맞이꽃이잖아요. 그런데 베토벤의 세레나데를 연주한 비올리스트의 성이 달맞이꽃인 겁니다. ‘이제부터 비올리스트는 프림로즈다!’ 결정했더랬지요. 이후로 그 단어는 온전히 잊어버리지 않는 개념으로 외워졌습니다. 이런 식이었지요.

당시 늦은 시간에 음악프로 진행하던 묵직한 음색의 아나운서가 어느 날인가 시를 한 편 읽어 줬습니다. 황금찬 시인의 [오후의 한강]에 수록된 시 가운데 폐허를 벗어나지 못한 1950년대 후반의 서울을 찾아준 피아니스트 <아르튀르 루빈스타인에게 바치는 시>였습니다.

아직도 귓가를 맴도는 낭독자의 음색이 쟁쟁합니다. 그래서 찾아 본 시집에는 뜻밖에 비슷한 느낌으로 가슴을 털어 낸 피아티고르스키의 음색을 읊은 시도 있더군요.

그런 판에 베토벤의 세레나데를 바로 이 양반의 연주로 듣다니요. 밤새우기가 일종의 커리어인 철없던 시절에 끼어 든 참 잊을 수 없는 곡이지요.

자꾸 듣다보니 네 번째 악장보다 더 기막힌 음률이 저로서는 두 번째 악장이더군요. 짤막한 멜로디로 7개나 되는 악장을 가진 이 곡, 음악 처음 듣는 모든 사람에게 적극 권합니다.

특히나 귀하게 엄마 뱃속에 자리 잡은 참한 새댁의 ‘무조건 사랑하는’ 그 애기에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무조건 ‘강추!’입니다. 주변의 모든 어른이 축하하며 눈 시리게 기다리는 애기의 태교음악으로 이처럼 좋은 곡이 있을라고요.

더군다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음악이 <세레나데>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참한 제 어미를 부모로 둔 이 생명이 앞으로 음악만 듣는대도 전 모릅니다.

올 여름 달맞이꽃 별로 못 본 채 넘어갔으니 CD보다 훨씬 볼품 있는 LP 꺼내들어 멋진 표지 한 번 보고, 프림로즈가 따뜻한 음색으로 도덕선생 같은 하이페츠의 또박또박한 음색을 감싸주고, 피아티고르스키의 너그러운 첼로소리로 오랜만에 가슴 울렁거리며 기다리던 사춘기 때로 돌아가 보렵니다.

달맞이꽃은 다 졌겠군요. 참 술 좋아하신다는 황금찬 시인은 고령이신데 떠나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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