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쏼라 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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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쏼라 쏼라'
  • 임계재 시민기자
  • 승인 2013.08.24 15: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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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재의 음악놀이터]처크 맨지오니의 '산체스네 아이들'

중국어로 몇 마디 하면 옆에서 놀립니다.

“뭘 쏼라거리고 그래?”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의 함의를 깨달은 것은 나이 흠씬 먹어서입니다. 우리가 평소 흔하게 그리고 가볍게 쓰는 이 말이 중국의 위진남북조시대의 문화와 깊이 연결돼 있더라고요. 훨씬 무겁고 비장한 의미를 내포한 말이지요.

잦은 전쟁으로 피난하느라 음식을 기름에 볶아먹기 시작한 시기, 여유 있는 계층에서는 더러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서민들에게는 보관이 좀 더 길고 기름기로 배도 채우려는 고달픈 이유를 먼저 들어야할 겁니다.
 
어린 것들 간수하고 이리저리 떠돌아야하는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 이 시기 불교가 유입되었는데 ‘지금 고생하는 이유가 전생과 잇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세에서 적선을 많이 해야 내생에 편하게 살 거다.’에 얼마나 매달리고 싶었겠어요.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심정이 아닐 런지요,
그도 저도 안 되면 아예 고향을 떠납니다, 농경 문화권에서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을 두고 떠난다는 것만큼 큰 형벌이 있을라고요. 그것도 아예 거대한 강을 넘어서요.

중국의 장강(우리에게는 한 지류인 양자강이라고 보통 칭하는 곳이지요.)을 훌쩍 넘어선 곳. 과거에는 초(楚)나라로 칭해진 곳, 그 아래지역으로요. 춘추시기에도 초나라는 너무 멀고 가기 힘든 곳이기에 책임지지 않을 이야기에는 의례 ‘초나라에 무기 파는 사람이 있었는데...(矛盾)..’ 이렇게 얘기를 풀어냅니다. 바다만큼이나 넓은 강, 험한 산 너머까지 일부러 확인하러 갈 일없는 건달은 별로 없을 테니까요. 물론 항우나 유방, 그리고 기막힌 왕소군 등이 초나라 출신인 것이야 다 아는 말이지만 그렇거니 여기고 지나갈 판인 곳, 강남이지요.

"그건 이민이예요. 확신합니다. 다른 나라로 떠나간 겁니다."

자기들이 자란 곳과 다르게 덥고 습한 곳, 고향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주먹만 한 바퀴벌레가 날아서 덤비기도 하고 나무도 풀도 다른 땅, 모든 게 낯선 곳에 기존의 모든 것 내려놓고 오로지 친구 하나 믿고 가는 겁니다. 용기 있는 개척이 아니고 떠밀려서,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지요.

그게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었습니다.

다행히 쌀은 한 해에 두 번이나 거둘 수 있습니다만 푸석하기 이를 데 없어 알알이 흩어지는 미질에, 먹기는 해야겠고, 그래서 밥그릇 입에 바싹 붙이고 입안으로 ‘긁어 넣는’ 겁니다.

왜 밥그릇을 들고 먹느냐고요? 그 사람들 말로는 “내 밥그릇 내가 챙긴다!”이고 우리처럼 상에 놓고 먹으라면 “내가 개냐? 밥그릇을 바닥에 놓게!” 이러면서 야단치는 겁니다. 그것이 문화가 된 것이지요. 북방에서는 밥그릇 들고 다니며 먹는 사람 드물어요.

청나라 말기, 산동성에서 곧장 선을 그으면 우리나라 서해안에 닿지요. 화교들이 조국 버리고 용기 내서 옮겨 앉은 곳, 그곳은 조선 땅이었습니다. 화교야 명나라 시절부터 있었으니 유래는 훨씬 오래됐지만 우리나라로 온 것은 구한말 쯤 되겠지요.

말 통하는 사람끼리 모여 살아야 그나마 숨통이 트이겠지만 사람 사는 일, 더구나 이국땅에서 팍팍한 삶 영위하는 데 다툼이 없을라고요.




인류학자인 오스카 루이스의 [산체스네 아이들]을 읽었던 오래전,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60년 대 초반의 멕시코시티, 한 달 12달러가 대가족의 총수입이었다지요. 삼십 년도 훨씬 넘은 그 때의 독서에서 가장 아팠던 부분은 ‘죽음이 더 큰 일’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장사 지내는 일에 보통 돈이 드는 게 아니니 끼니도 어려운 판에 말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싸움이 잦지요. 조용조용한 말투로는 너무나 힘든 상황을 남에게 전달하기에는 효과가 없는지라 악을 쓰게 되고요. 안 그래도 못살겠는데 소리 질러대니 걸핏하면 싸움판입니다. 살아남으려는 방편이겠지만 가슴 아픕니다, 꼴통 아버지의 고함에 질리지요.

우리 땅에 이민 온 중국 사람들도 짜장면이나 만들어 팔거나 막노동으로 겨우 살아내는 상황에서 나직나직한 어조의 조리정연한 의사전달은 애저녁에 접어야할 판이고, 고약한 날씨나 다른 언짢은 문제까지 끼어든다면 결론은 뻔합니다.

"아니 왜 소리는 지르고 난리야.."

"내가 언제 소리 질렀다고 그래!"

"그럼 당신이 조곤조곤 말했단 말이야?"

그러다 감정 납니다.

"엇다대고 반말이야?"

"내가 언제 반말했다고 그래!"

레퍼토리 다 드러나고 ‘에라 한 판 붙자!’ 산체스네 동네마냥 드잡이가 벌어지겠지요.

상대방 말 들어줄 여유가 있나요? 자기의 주장이 우선인데, 이럴 때 저처럼 기승전결 펼치려는 더듬한 인간이 말 꺼낸다면 안 그래도 성질난 판에 뭐라고 하겠습니까.

'됐어, 됐다고!' 요게 중국말로 '쏼라 쏼라'입니다. 쏸러(算了), 쏸러(算了)...됐다고요, 셈 끝났으니 그만하라고요! 이 뜻입니다.

우리 귀에는 “쏼라 쏼라”로 들렸을 겝니다. 한동안 입에 오르내렸던 “닥치고!”입니다.

중국에 가서 터무니없이 바가지 씌우려는 장사꾼에게 이리저리 말 붙이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저도 더러 소리 지릅니다. “쏼라, 쏼라, 안사요, 안 사!”

가끔 학생들에게 묻습니다.

“엄마에게 신경질 내면서 ‘아, 됐어!’ 이러고 ‘쾅!’, 문 안 닫은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요.”

'히히히...' 단 한 명도 없습니다.

“못된 것들, 어디 엄마에게 ‘됐어!’라고 말해? 버릇없긴, 그게 ‘쏼라 쏼라’인데. 엄마 덕에 나한테 구박받는 거니까 이번 주말에 설거지 도맡아 해요, 알았지요?”

속없는 학생들 합창합니다.

“네에...”

며칠 있으면 퇴원할 거라며 허락 받아서 병원에서 가까운 연주회장에 <송년 음악회> 다녀오고 날짜 세는데 복원수술 잘못돼 다시 갇혀 언제 나갈지 모를 신세가 됐던 그 시절, 트럼펫과 흡사한 플루겔 혼의 귀신 처크 맨지오니가 내한했습니다.

입원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시절, 스물 세 시간이 넘게 연주한다는 [산체스네 아이들], 앞뒤를 빼곡 채우고도 사실은 좀 모자란다는 음반을 더러 꺼내 <꼰수엘로의 사랑> 부분을 듣곤 했지요. 집안에서 유일하게 똑똑하고 영악한 딸내미가 먼 곳으로 돈 벌러 가고 그나마 딸이 보내주는 돈으로 살아가야 하는 멕시코, 제가 좋아하는 화가 ‘프리다 칼로’가 활약했던 그 멕시코가 어찌 그 지경으로 몰렸는지 심란했던 기억인데, 처크 맨지오니는 영화로 만들어진 이 실화에 꼰수엘로를 사랑에 빠진 젊은 처녀의 달콤한 경지로 데려다주니 대단한 작곡가이며 연주가임에 틀림없습니다.

당시 제 처지는 병원 밖으로 나갈 수 없으니 마음 접어야할 밖에요. 집에 가면 음반이라도 있지만 그림의 떡, 오디오 옮겨올 수도 없는 형편이잖아요.

가고 싶었지만 못 간 연주회가 어디 하나 둘 이었겠습니까만 퇴원은 언제가 될지 모른 채 병원에 잡혀 있어야하는 마음이 참 고약스러웠습니다.

지금도 더러 맨지오니 음악이 떠오르면 입맛 씁쓸해집니다. 그러다 마음 다스리지요.

‘쏼라 쌀라’
이렇게 음악 이야기 나누는 게 어딥니까.
닥치고, 쏼라.

ps. 제가 가지고 있던 오래된 책은 빌려간 분이 이민을 떠나는 바람에 함께 이민 갔는데 몇 년 전에 다시 출간된 모양입니다. 한 권 더 사 둬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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