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황동규 시인의 시집 '사는 기쁨' 리뷰

▲ 사는 기쁨 책 표지@ (주)문학과 지성사

우연히 도달하면 어렵지 않으나           遇之匪深(우지비심)

억지로 다가갈수록 더욱 보이지 않는다. 卽之愈稀(즉지유희)

-『사공도 이십사시품』 중 沖淡 일부

 

 

1. 沖淡(충담)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외로워지는 것이다. 이전보다 관계의 강도는 희미하고 범위가 줄어들어 스스로의 공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문득 문득 외로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마다 그것을 맞이하는 방법이나 태도는 많이 다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상황을 고통스러워하며 노년을 보내게 되지만 어떤 이는 깊고 담백하게(충담沖淡) 이를 받아들이기도 한다.

 

시인 황동규는 올해 76세(1938년 생)로서, 우리의 구분으로 그는 노년의 나이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사물들은 외로움보다 평화로움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그는 대단히 담담해 보인다. 따라서 이전의 그의 시집들을 포함해 이 시집까지 관통하는 정신을 담백함이라 해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물론 시인에게도 외로움이 있을 터이지만 그는 외로움을 자신의 공간에서 녹여 다시 우리에게 검박한 그의 언어로 이야기한다. 노년이라는 시간적 육체적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 그의 시편들에서 우리가 어떻게 나이 들어가야 할 것인가를 노시인은 낮고 조용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전혀 강조하지 않고 혼자 읊조리는 듯 보인다.

 

나이 듦과 내면의 성숙은 지극히 개인적인 몫이지만 우리가 살아내야 하는 노년의 삶은 온전히 나의 것만은 아니다. 내가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커지는 노년의 삶이 비교적 평화로우면 나를 도우는 세상도 조금은 평화로워 질 것이다.

 

그의 시집은 하나하나 열거하기 어려울 만큼 많다. 대표작으로는 『어떤 개인 날』『풍장』『외계인』『꽃의 고요』『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등이 있는데 이번 시집 『사는 기쁨』은 그의 열다섯 번째 시집으로 2013년 작품이다.

 

2. 용서 받아야 할 ‘사는 기쁨’

노년의 그에게 보여 지는 사물들이 어찌 평화뿐이겠는가? 모든 것이 쓸쓸해지는 가을 풍경을 보며 노년의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개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마른 국화 몇 잎」일부

 

늦은 가을 날 국화마저 말라버린 그 스산한 시간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져 온다. 노년에는 모든 것이 자신을 떠나는 것으로 느껴지는 모양이다. 하기야 이제 막 50을 넘긴 나에게도 다가오는 것 보다는 떠나가는 것이 더 많은데 80을 앞둔 시인의 눈에는 오죽하랴!

 

가을을 보는 마음은 누구나 비슷하지만 시인의 생활태도나 품격은 우리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우리의 시선은 사라져 가는 것에 국한된다면 시인의 시선은 그 사라진 자리에 남은 여운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시인이라는 특별한 감수성의 영향도 없지는 않겠지만 진중하게 나이든 삶의 능력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은 시집의 발문에서 스스로 평생 시를 좇았다는 표현으로 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동시에 스스로의 때깔로 물드는 단풍 같은 삶을 아름답다고 이야기 한다. 짧은 두 줄을 읽으며 나는 갑자기 나도 모르게 울컥 뜨거움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뿐만 아니라 가득 찬 잔만큼 남은 잔도 아름답고 황홀하다고 말하면서, 그런 아름다움과 황홀을 느끼는 마음이 혹여 분에 넘치는 것일까 저어하여 시인은 모두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다. 아! 이 얼마나 담담한 사치이며 평화로운 삶의 기쁨인가?

 

3. 飄然(표연)

 

여기서 자고 가지, 마음먹었다.

산들이 함께 잠들었다 깨준다면 좋고

밤사이 다들 슬그머니 자리 떠

다음 날 텅 빈 세상 만나게 돼도 그만 견뎌낼 것 같다.

이제야 간신히

무엇에 기대지 않고 기댈 수 있는 자가 되었지 싶다.

 

-「산돌림(지리산 가는 길에, 마종기에게)」부분

 

나이 드신 분들의 한결 같은 소망은 명예로운 죽음이다. 살아온 세월의 명예만큼, 죽음 또한 그러하길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어쩌랴 죽음도 생명의 탄생처럼 스스로의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일임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동년배의 의사이자 시인인 마종기에게 지리산을 오르다 이 시를 문득 지었을 시인의 심상은, 일상의 삶에 어느 날 문득 죽음이 찾아와도 슬그머니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느낌이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를 지칭하는 ‘산돌림’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언제인지 어디인지 알 수는 없지만 한 줄기씩 내리는 저 소나기처럼 죽음 또한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올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 문득 네게 찾아와도 담담하게 죽음의 손을 잡은 다음 날, 아무도 없는 텅 빈 세상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시인의 마음은 죽음에 대한 표연한 태도일 것이다. 더불어 이제는 짙은 그늘과 향기로운 열매를 제공할 당당한 나무가 간신히 되었음도 이야기 한다. 그것은 죽음으로 다가 가기 전에 시인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받아 왔던 것처럼 이제는 시인 스스로 세상에 나누어 주려는 의지의 피력이며 동시에 겸허해지려는 심상의 표현이다.

 

하지만 시인은 삶의 마지막에 대해 멋진 농담으로 스스로 고고한 척 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할아버지 같은 표정으로 삶의 기쁨과 함께 다가오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올더스 헉슬리는 세상 뜰 때

베토벤의 마지막 현악사중주를 연주해달라 했고

아이제이어 벌린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소나타를 부탁했지만

나는 연주하기 전 조율하는 소리만으로 족하다.

끼잉 낑 끼잉 낑 댕 동, 내 사는 동안

시작보다는 준비동작이 늘 마음 조이게 했지

앞이 보이지 않는 갈대숲이었어.

꼿꼿한 줄기들이 간간이 길을 터주다가

고통스런 해가 불현듯 이마위로 솟곤 했어.

생각보다 늑장부린 조율 끝나도 내가 숨을 채 거두지 못하면

친구 누군가 우스갯소리 하나 건넸으면 좋겠다.

너 콘돔 가지고 가니?

 

-「세상 뜰 때」전문

 

헉슬리보다 아이제이어 벌린 보다 시인의 친구 말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죽음에 대한 선입견이 깨끗이 무너져 버린다. 천상병 시인이 ‘소풍’온 장소로 이 세상을 묘사했듯, 시인을 보내는 친구들의 태도는 지금의 세상에서 다음 세상으로 시인을 즐거이 보내주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장면에서 시인은, 연주는 아예 듣지도 못하고 조율하는 소리만 들어도 좋겠다고 너스레를 떤다. 그런가하면 친구들은 문득 콘돔이야기를 꺼낸다. 콘돔이라니! 일찍이 볼 수 없는 죽음의 장면이다. 죽음은 매우 심각하고 슬프다. 아니 슬퍼해야 한다. 그것이 삶을 마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우리는 오랫동안 배워왔고 또 인정해 왔다. 그런데 시인은 이 모든 관행을 슬쩍 넘는다. 그리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결코 죽음은 슬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잠시 들른 이 세상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가는 출발의 의미가 있음을 기발한 생각으로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4. 일상의 기쁨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觀照의 자세이며 성찰과 통섭이 느껴진다. 물론 팔십을 앞 둔 일가를 이룬 학자로부터 비롯된 것도 있겠지만, 몇 개의 시편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은 학문적 성취와는 매우 다른 계열의, 삶에 대한 태도의 성숙과 수용의 그것이다.

 

불을 켰는데도 어두워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면

형광등 자리에 형광등 켜 있고 달력과 그림들 제자리에 걸려 있는

그저 그런 저녁

형광등 수명이 다 돼 그런가, 새것으로 갈아야?

의자를 옮기려다 생각한다.

혹시 시력 낮춘 건

졸아드는 에너지 아껴 쓰려는 몸의 지혜가 아닐까?

 

몸이여, 그대 처분에 나를 맡겨야 하지 않겠나.

주어진 시력 계속 쓰다가 어느 순간

눈 없어 더 환하다는 세상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만큼

보는 맛 조금씩 더 돋구며 살다

.......

-「이 저녁에」부분

 

일상에서 노년의 육체가 느끼는 어두침침한 형광등 불빛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나이 듦에 대한 불만이나 원망은 없다. 오히려 현재 보이는 이 정도의 어두침침함은 몸의 자연스런 반응으로 생각하거나 아니면 몸이 하는 대로, 즉 자연과 우주의 질서가 하는 대로 여유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수용의 태도는 시간과 육체의 균형을 이해하고, 동시에 거대한 일상의 흐름 속에 단지 존재하다가 스러져가는 자신, 혹은 우리의 모습을 긍정하는 경지가 바닥에 깔려 있다.

 

이러한 생각은 역시나 죽음이라는 거대하고 육중한 현실과 늘 맞닿아 있는데 “무중력을 향하여”라는 시에서 시인의 태도는 분명해 진다. 무중력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내포하고 있듯이 죽음은 가벼워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생에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가치로부터 가벼워지는 것이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순간, 내가 뭐지? 묻는 조바심 같은 것 홀연 사라지고

막혔던 속 뚫린 바보처럼 마냥 싱긋대지 않을까.

뇌 속에 번뜩이는 저 빛,

생각의 접점마다 전광 혀로 침칠하던 빛 문득 사라지고,

생각들이 놓여나 무중력으로 둥둥 떠다니지 않을까.

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

 

-「무중력을 향하여」부분

 

‘내가 그만 내가 아닌 자리’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시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살아있는 동안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와 의미가 부여된 ‘나’라는 존재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죽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결코 어둡지 않다. 암흑처럼 둔중한 죽음이라는 실체를 오히려 깃털처럼 가볍게 표현하고 있다. ‘조바심 같은 것 홀연 사라지고’라는 대목에서 그 가벼움의 연원은 삶에 대한 진지함이었으며 그 어느 것도 소홀히 하지 않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

 

5. 기쁨의 본질

 

시인이 느끼는 기쁨의 대상은 늘 우리 주위에 있는 사물들이 대부분이다. ‘하루살이’ ‘휴게소’ ‘이불’ ‘형광등’ ‘첫눈’ 등에서 우리가 느끼고 있었지만 알 수 없었던 기쁨을 하나씩 꺼내 글로 옮겨 놓았다. 기쁨이란 무엇에서 오는가? 기대하지 않거나, 아픔을 잊게 해주거나, 작은 소원이 이루어졌거나하는 일에서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그런데 이 기쁨은 오래 유지되는 기쁨은 아니다.

 

오래도록 유지되는 기쁨은 대상물로부터 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상물을 통해 스스로 느끼는 기쁨이다. 시인이 보는 모든 대상물들은 일반적으로 매우 사소하거나 무의미한 것들이지만 그곳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느낀다는 것은 시인이 그 대상물로부터 느끼는 것 보다 대상물에게로 향하는 시인의 따뜻한 기쁨의 시선 때문이다. 하여 시인은 그 기쁨을 사는 기쁨이라고 이야기하고 혹여 그 기쁨이 너무 분에 넘치지 않을까 걱정하여 모두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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