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재의 음악놀이터]아기에게 들려줄 루치아 포프 독일동요집

나이 들수록 우리말이 기막힌 표현이 많다는 생각이 부쩍 듭니다. 이제사 철이 조금 드는 건지, 아니면 그동안 나 몰라라 팽개쳐 뒀던 무심함에 정신이 돌아온 건지는 분명치 않지만 결국 문화가 반영된 언어의 맛을 많이 느낍니다.

남보다 많이, 아주 느지막이 결혼해 아들, 딸 낳고 사는 사람이 주변에 꽤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결혼이 늦어지면서 어른들 걱정인 ‘2세’ 탄생의 우려를 말끔히 불식시키는 신통한 사람들 말입니다.

갓 태어난 남자아기들에게 ‘떡두꺼비’ 같다는 말은 참 맛깔스럽습니다. 두꺼비 보기가 어려워지는 요새 젊은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겠지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두꺼비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개구리보다 튼실해 보여 그런 표현을 쓰신 게 아닐까요.

아무튼 떡두꺼비가 몇 녀석 태어났습니다.

그 가운데 정말 챔피언 먹어도 될 아빠 엄마 사이에서 뽀얀 달덩이 같은 녀석이 아장아장 걸어 다니고 있습니다. 전라북도 사람들은 ‘자박 자박 걷는다’는 기막힌 표현을 쓰더군요.

"저 사람, 결혼 생각이 아예 없나 봐요. 제가 누군가를 소개했는데 별 반응이 없던 걸요."

당사자도 할 말은 있나봅니다.

"동문이라 어색하기도 하고요. 뭐, 지금은 바빠서요."

이유를 듣고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장가가면 참 잘 살 텐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주변 걱정에 아랑곳없이 재치 있는 이 총각에게서 별다른 신분상의 변화는 십 여 년을 봐왔는데도 도무지 없었습니다.

"어차피 식구될 건데 뭐 하러 삼 년이나 묵혀요?"


솔솔부는 봄바람- 루치아 포프(출처 : 유투브)

몇 년 전 추석 무렵 모처럼 연락이 왔습니다. 형님 댁에 차례 지내러 왔는데 잠시 보자고요. 늦은 시간 집근처에 나갔더니 '꺽다란' 총각 뒤로 뽀얗고 참한 여성이 손에 카드를 들고 있는 겁니다. 다짜고짜 외쳤습니다.

“가냐?”

얼마나 반갑던지요.

색시 될 처녀 등을 한 대 때렸습니다.

일찍 사고 쳤으면 딸 시집보낼 나이의 총각은 역시 새신랑이라 결혼식장이 훤하더군요.

그리고 2년 후 추석, 애기 보여드린다며 다시 연락이 왔습니다. 참 괜찮은 어른 남자입니다.
집 앞 공터에 아빠에게 안긴 ‘애기 남자’, 엄마 모습에 아빠 곱슬머리,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여자들 애 키울 때 집안에 갇혀 지내는 상황 잘 알기에 맛있는 차 꾸러미를 애기에게 들려주었습니다만 그 ‘애기 남자’는 조심스레 만져 보려는 고사리 손을 뿌리치는 겁니다.

물론 선물도 받지 않고 고개를 홱 돌린 채로 말입니다. 내 딴에는 애기들이 낯선 어른의 눈빛에 두려움을 느끼는 걸 알기에 발 만지고 다음 순서로 손을 잡은 건데 ‘까인’ 겁니다.

“이 녀석아, 지금 이 나이 먹도록 나를 이렇게 깐 남자는 네가 처음이다! 감히 나를...”

“그러게 말이에요, 얘가 좀 까칠하고 뭘 몰라요! 히히”

팔불출 하나 더.

맨 날 제 엄마랑 만 있다 보니 낯가림이 심할 수 있지요.

“너 그러면 네 아빠에게 줬던 점수 도로 뺏는다!”
 
저는 치사하게 나갔습니다만 진 겁니다.

“우리에게 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마음으로 많이 감사하고 축복의 말을 중얼거렸습니다.

이 꼬맹이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노래집이 있습니다.

모차르트 음악이 아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말은 많이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아이 키우면서 더 적당한 노래가 있어요. 못 알아들어도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는 음반입니다.
루치아 포프 (Lucia Popp 1939 – 1993) 라는 체코 출신의 소프라노가 부른 [독일 동요집]이 바로 그것입니다.
모차르트 [마술피리]가운데 최고난도인 <밤의 여왕의 아리아>를 가장 많이 부른 성악가로도 알려져 있는 이 양반은 워낙 심한 굴곡을 오가는데다 길이는 또 왜 그리도 긴지, 아무튼 여자 성악가 목소리 나간다는 이 아리아 자주 부르다 보니 리릭한 소리를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만 아이들 듣기에 편안하고 익숙한 노래는 칭얼대는 아이를 순한 양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는 참 좋은 노래집입니다.

초등학교 음악책에 실린 <솔솔 부는 봄바람>은 피콜로 전주를 앞세워 새소리 들리는 봄의 정경이 다가듭니다. <뻐꾹 뻐꾹 봄이 가네>는 또 어떻고요. 초등학생들이 목이 터져라 따라 부릅니다. 자기도 아는 곡이 들리니까요. 아주 신이 납니다.

잠투정 하는 애기에게 들려 줄 <자장가>는 꿈결 같은 벨소리에 아줌마의 다독이는 고운목소리에 머잖아 꿈나라로 빠져들 겁니다.

아주 어린 애기부터 초등학생들까지 모두에게 무릇 어린이라면 누구누구 가릴 것 없이 한 장씩 마련해 심통 부릴 때마다, 아니면 까르륵 까르륵, 웃음소리가 못 견디게 사랑스러울 때 엄마와 애기가 한 번씩 듣다보면 어린 영혼의 고운 심성이 아주 오래 유지될 것 같은 음반입니다. 천사가 천상의 노래를 듣는 거니까요.

문화 수업할 때 첫 시간에 이 음반 챙겨가 우선 들려줍니다.
의아해하는 학생들에게 우리나라와 중국에 서양문물이 들어온 경로 설명하며 독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의 태도 또는 영향력을 설명해 주기 위해서 입니다.


자장가 - 루치아 포프(출처 : 유투브)

설명 이전에 학생들은 어려서 배웠던 동요가 사실은 독일노래였다는 사실을 알고 눈을 빛냅니다. 선생이 잘난 척할 수 있는 굉장한 기회이니 놓칠 수 없지요. 혹세무민이랍니다.

그나저나
 
"김강민, 너 그렇게 네 아빠의 선생을 ‘까는’ 것 아니다! 너보다 일 년 반이나 늦게 태어난 장서준은 아직 이도 나지 않은 4개월짜리인데도 내게 덥석 안겨 벌쭉벌쭉 웃고 눈 맞추는데, 네가 아무리 불학무식하기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지금 무지하게 불평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남자에게 내침을 당한 게 원통해서지요.

고맙고 귀한 어린 영혼들, 물질보다 마음으로 모셔주어야겠지요.
유난히 애기들 좋아하고 마음껏 사랑하는 이유는 영악스러운 ‘노후대책’이랍니다.

장차 좋은 세상 만들어 갈 이 애기들이 심성 곱게 자라면 세상이 좀 더 빨리 평화로워질 테니까요. 그러면 남보다 늦게 낳은 자식들의 장래 걱정에 손톱여물 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어른이라고 동요가 안 좋겠습니까? 어른들의 지극한 염원으로 만들어진 이 음반, 예전에는 무척 많이 선물했는데 받는 꼬마들마다 탄성을 질러대곤 했습니다. 같이 흐뭇해졌지요.

수입음반이라 가끔 절판 돼 못 구할 때도 있었는데 요즘 잘 모르겠네요.
정보 드렸으니 부모들이 알아서 챙겨두시면 좋을 듯합니다. 디지털 세대니까요.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두어 개 남겨 두었다가 애기 남자의 뇌물로 쓸 걸 그랬나봅니다.
모름지기 물질이 마음을 앞설 수도 있겠지요, 헐! 이런 선물이라면 말입니다.

인화초(人花草), 옛 어른들은 서너 살 먹어 말 시작한 애기들에게 이런 표현을 쓰셨습니다. 얼마나 이쁘기에 애기를 ‘꽃’이라고 하셨는지 문리 조금씩 터 가면서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결국 표현의 다양함은 문화적 다양성을 바탕에 두고 있겠지요. 우리말의 고소한 맛, 깜짝 놀라게 아름다운 기막힌 표현. 부지런히 써야겠습니다.

물론 정신 차리고 공부 열심히 하는 게 급선무일 겁니다. 加油!(지야요우, 중국어로 파이팅입니다. 중국의 어떤 지역 사람이 정말로 기름을 더 넣었다지요).

<임계재의 음악놀이터>는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았거나 감동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공간이다. 글쓴이 임계재 선생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면서, 현재 숙명여대에서 중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학창시절, 전공 공부보다는 음악듣기에 더 빠져 있었다는 게 글쓴이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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