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피기 "로마의 소나무" 음반 리뷰

▲ 음반표지 사진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바라보는 포로 로마노의 풍경

1924년 로마에서 초연된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는 19세기 중엽에 헝가리의 작곡가 F. 리스트가 처음으로 쓰기 시작한 '교향시'라는 음악형식의 범주에 들어있는 음악이다. 교향시라 함은 좁은 의미로는 '여러 악장으로 구분된 표제 교향곡' 등과 구분하기 위하여 단일 악장으로 된 음악을 가리킨다.

표제 음악은 이미 바로크시대부터 있었으나 이전 시대의 표제음악과 교향시의 표제가 다른 점은 교향시의 표제는 지금까지 전혀 음악적 표현방법으로 다루지 않았던 복잡 미묘한 시적·회화적·심리적·서사적·지방적·영웅적 내용들을 음악적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운동의 커다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주관적·개인적인 감정의 자유가 가져온 결과로 생각된다.

레스피기(1879~1936·Ottorino Respighi)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이다. 볼로냐는 16세기 초 교황령에 편입된 이후 이탈리아 통일할 때 까지 자유와 번영을 누린 곳이다. 레스피기는 이곳에서 음악 교육을 받고 러시아로 건너가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국민 음악의 대표적 인물로서 레스피기의 작품, 특히 이 음악 <로마의 소나무>가 가지는 이탈리아적 감성의 기초를 제공한 인물로 추정된다.

<로마의 소나무>는 '로마 3부작'으로 불리는 <로마의 분수>(1916) <로마의 소나무>(1924) <로마의 축제>(1928) 중의 하나인데 모두 이탈리아의 유서 깊은 수도 로마(Roma)의 대표적인 풍물과 그 역사적·신화적 이미지를 다룬 교향시들이다. 레스피기 특유의 화려하고 세련된 관현악 기법과 고전적 형식미의 조화를 잘 보여주는 음악이다. 아마도 레스피기는 거의 유일하게 오페라가 아닌 관현악 작품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곡가일 것이다.

로마에는 소나무가 참으로 많다. 시내의 거의 모든 가로수가 소나무인데 우리나라의 소나무와 비슷하기도 하지만 약간은 차이가 있었다. 기후(지중해 기후)에 잘 맞는 것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가 레스피기에 의해 위대한 음악으로 변환되어 더욱 로마의 소나무를 유명하게 만들고 있다.

제1부 보르게제 저택의 소나무

매우 소란스럽지만 저음의 악기가 조용한 탓에 거슬리는 소란함은 아니다. 트릴(꾸밈음으로서 떨듯이 연주하는 방법)과 글리산도(여러 음을 미끄러지듯이 연주하는 방법)가 반복되는데 이는 보르게제 저택의 정원에서 아이들이 흥겹게 뛰어노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현악과 관악이 서로 주고받는 중간 부분은 숲 속의 새들의 지저귐인 듯하고 관악에 의해 마무리되는 현란하고 소란스러운 마지막 부분은 뒤이어 나올 어둡고 조용한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기 위함으로 보인다.

제2부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  

카타콤베는 고대 로마의 기독교 박해 시대에 존재했던 지하의 비밀 분묘 겸 예배당인데 이곳에서 실제로 연주되고 있는 듯, 매우 어둡고 침울한 저음의 현악이 나지막하게 퍼진다.

마치 Gregorian chant를 듣는 분위기인데 Gregorian chant란 가톨릭교회의 로마 전례 성가로서, 중세 이래 계승되고 있는 대표적 성가의 형식인데 실제로는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604년 사망)에 관련해서 그레고리오 성가라고 하는 7·8세기 이래의 습관에 따라 이렇게 부르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성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곡의 중반부 낮은 저음의 현악에서 로마제국의 권위를 느끼게 하는 부분과 마주하게 된다. 그런데 왜 내가 이런 느낌을 가지는 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 기억 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는 인위적이며 조작된 로마제국의 느낌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아마도 이전의 영화음악이나 혹은 그런 부류의 영상들과 함께 들어온 음악의 조각일 것이다. 이를테면 음악적 감상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감상이 아니라 시각적인 것과 내면의 모습, 그리고 지식의 저변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것으로 구축되는 복합적 이미지인 모양이다.

클라이맥스에 도달하는 완만한 곡선의 느낌은 로마 주변의 산세와 무관하지 않다. 도대체 급격한 느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로마 근교의 산들, 우리나라의 언덕보다도 훨씬 완만한 높이의 구릉지에 서 있는 소나무를 본 레스피기의 느낌 그대로를 음악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제3부 자니콜로의 소나무 

 

▲ 자니콜로 언덕에 서 있는 가리발디 동상과 소나무 ⓒ 김준식

로마의 테베레 강의 서쪽, 바티칸의 남쪽에 위치한 자니콜로 언덕을 배경으로 한 3부의 분위기는 명랑하고 동시에 몽환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고음의 관악기(오보 혹은 플루트)가 연주하고 그 배경으로 낮지만 밝은 화성의 현악의 반주가 깔린다. 1부의 글리산도가 차용되어 분위기를 더욱 몽환적으로 끌고 가다가 관악의 독주가 정적인 소나무의 느낌을 묘사해내고 있다. 이어서 멀리 내다보이는 로마시내의 풍경과 언덕위에서 부는 최소한의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 그리고 마음속으로 울리는 그 모든 것의 변화를 부드럽고 어둡지 않게 표현하고 있다.

돌연 정적이 흐르고 얇은 관악기의 음색 뒤에 새소리가 들린다. 이 지역에 있는 나이팅게일의 소리가 관혁악에 포함되어 음악인듯, 자연의 소리인듯 서로 조화롭게 어울려 상쾌한 잔향을 남긴다. 

제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 ⓒ 김준식

아피아 가도는 고대 로마의 가장 중요한 도로로 길이 50km, 너비 8m인 로마의 켄소르(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BC 312년에 건설을 시작한 도로이며, 도로명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는 로마와 카푸아 사이였으나 BC 240년경 브룬디시움(브린디시)까지 연장되었다.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인 셈이다. 그 아피아 가도 양 옆으로 소나무가 끊임없이 심겨져 있는데 지금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무거우나 힘이 느껴지는 저음의 관악, 현악들 위로 불안한 느낌의 중음의 현악과 관악이 덧씌워지고 그 위로 다시 관악독주가 이어지는 중층구조를 보이는데 여전히 단속적인 저음은 배경으로 깔리고 있다. 로마는 피의 정복으로 이룬 제국이다. 거기에 음습한 죽음과 압제도 있었겠지만 외부적으로 빛나는 영광도 동시에 있었다. 나팔소리가 홀연히 들리는 것은 레스피기가 본 아피아 가도는, 바로 그 영광과 피의 역사가 공존하는 곳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광의 나팔소리가 점점 커지는 국면이지만 끝내 피의 역사도 있었음을 저 깊숙이 여전히 울리고 있는 단속적 저음이 그것을 반영한다. 그 영욕의 역사를 아피아 가도 주위에 서있는 소나무들은 알고 있는 것처럼 음악은 장엄하고 거대하게 울리며 음악은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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