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 '연등'과 일년 내내 켜진 법당 안 '전등'에 대한 단상

인류의 스승이신 부처께서 ‘연기’로 해서 이 땅에 오신지 2557년, 당시 삶의 모순과 비논리를 타파하시고 가장 논리적이고 가장 합리적인 삶과 자아의 성찰에 대해 말씀하셨다. 그리고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 그리고 과거의 삶을 연기로 설명하셨다. 그 분께서 탄생하신 날이 다가오고 있는 요즈음 이런 저런 풍경 속에서 아무렇게나 걸려 있고 심지어는 길거리에 나 뒹구는 조악하고 천박한 플라스틱 연등을 보며 몇 가지 생각을 해 본다.

▲ 절 마당에 거린 비닐등. 밑에 붙어있는 종이는 복을 기원하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먼저 2013년 현재 이 땅의 사람들에게 부처의 말씀은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생각이다.

많은 이들은 여전히 부처의 말씀(불경)을 통해 지혜를 얻고,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나아가 부처를 신처럼 숭배하기도 하지만 이천 오백년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오늘의 우리에게 삶의 방향과 지표를 알려주기에는 분명 약간의 어려움이 있어 보인다. 모든 것이 복잡해지고 다양해지면서 처음 부처께서 지향했던 삶의 본질에 대한 의문과 수행은 이미 설 자리를 잃고 말았다.

중국을 건너 이 땅에 부처의 말씀이 전해진지도 벌써 1600여년, 그 사이 원시 불교의 진리는 회절 되거나 심지어 왜곡되어 각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되어지면서 이제는 무엇이 부처께서 말씀하신 진리인지 모호해졌다. 각 불교 종단마다 입장의 차이가 크고 또 다양한데 대표적 종단인 조계종에서 수행의 방법으로 간화선을 전통이라 하지만 그 또한 중국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많은 수행자들이 다양하고 효과적인 노력으로 오늘의 상황에 맞는 새로운 불교의 방향에 대해 논의하고 있고 또 그 결과들이 나타나고 있지만 여전히 대중들에게 그 영향은 미미하고 여전히 산 속 어딘가에 자리 잡은 절에서 알 수 없는 이야기로만 가득한 불경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또 부처님 오신 날에 절에 복을 빌러 가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런 모습들이 부처의 가르침은 분명 아닐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두 번째 부처를 모시며 부처의 진리를 알리는 장소가 절이라는 곳인데 그 절에 대한 생각이다.

절이라는 본래의 목적은 부처 생존 시에는 설법의 장소였고 부처를 포함한 많은 비구와 비구니들의 거처였다. 부처 사후에는 부처의 상을 모셔놓고 그 상을 통해 부처를 기억하고 부처의 말씀을 수행의 범으로 삼고자 함이 그 목적이었다. 현재에도 이러한 기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절(사찰)은 법신으로서의 부처의 거처인 셈이다. 육신이 존재하지 않지만 법으로서 살아계신 부처의 집이라는 이야기다.

해마다 부처가 태어 난 날이 다가오면 이 절 주위에 등불을 내걸고 여기가 그러한 곳이라고 알리고 있는 것을 본다. 어느 종교에서나 등불은 어둠을 밝히고 진리를 상징하는 것인데 특히 불교에서는 이 등불에 대한 상징은 부처 생존 시의 유명한 ‘난타’설화(현우경(賢愚經)의 빈녀난타품(貧女難陀品)로 알 수 있다. 이제는 그 등불을 연꽃 형상으로 감싼 연등을 만들어 연꽃의 수승함과 등불의 의미를 함께 드러내어 부처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진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치이다. 그런데 요즘 여기 저기 분별없이 걸려 있는 연등을 보면 위대한 진리의 함의는 고사하고 천박하고 조악하여 보는 이에게 오히려 큰 실망을 주기 십상이다.

부처께서는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있어 여러 ‘방편’을 쓰셨다. 방편이라 함은 일종의 진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예시와 도구인데 이 허접한 플라스틱 연등 또한 그렇게 해석한다면 또 그렇게 이해 할 수도 있다. 가장 수승한 것이 가장 낮은 것으로부터 올 수도 있다는 절대 반전의 가르침이 부처의 말씀이기는 하다. 하지만 여기 저기 널 부러져 있는 저 허접한 연등을 보며 청정한 가르침을 떠 올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의심스럽다.

하지만 연등이라는 특별한 물건이나 사태만으로 전체 사찰의 문제를 다 헤아리거나 예단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가 있다. 청정도량을 지향하고 여전히 백척간두 진일보의 선풍으로 용맹 정진하는 수행자들이 여전히 많다. 몇몇 출세간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경험과 수행을 바탕으로 책을 내고, 그 책이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것을 보면 세상은 참으로 진리에 목말라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하지만 2600년 전에 만들어지고 이 땅에는 1600년이나 세월이 흐른 오래된 종교가 그 긴 세월과 공간을 넘어 언제나 빛나는 가르침이 되기 위해서 이대로 유지되어서는 어려울 것 같은 불안감을 감출 수 없다.

마지막으로 수행자들의 모습에 대한 생각이다.

▲ 법당 천장에 걸린 연등. 등불의 본래 기능보다는 복을 비는 기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몇 년 전에 입적하신 유명한 수행자이자 작가이신 스님께서 많은 책을 펴내시어 부처의 말씀과 우리의 삶이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알게 했다. 그 분의 책은 쉽고 일상의 모든 일에 부처의 진리가 숨어 있음을 알게 했다. 그 뒤 이러한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몇몇 수행자들이 책을 내고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는데 그 책을 읽어보니 누구도 이해 할 수 없는 은유의 말로 마치 진리를 이야기하는 듯 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세간의 척도로 유명한 대학을 나오고 그래서 그 책들이 팔려나가는(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또 찬찬히 읽어보면 서양의 종교처럼 절대자에 대한 논리도 등장하는) 이러한 기현상을 보면서 수행자가 가야 할 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수행자들 중 일부는 이미 세속화되어 부처를 이용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데 대표적 예가 이 나라 사찰, 그 부처의 집, 법당 안에 일 년 내내 켜져 있는, 조상 숭배를 핑계로 한 불순한 의도의 장명등 불빛이다. 부처님 오신 날 절 마당에(어떤 곳은 일 년 내내) 달려지는 연등과 각 종 등도 세속화 된 2013년 대한민국 불교의 증거들이다. 역시나 거리 곳곳에 달려 있는 저 허접한 플라스틱 연등도 예외는 아니다. 이제는 법당 안 장명등도, 법당 마당에 일 년 내내 전등으로 밝히는 그 등불도, 거리에 걸린 저 허접한 플라스틱등도 꺼야 할지 켜야 할지 고민해 볼 문제다. 아무리 반전의 가르침이 있다 해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면 수행자들 스스로 깊이 고민하여 다른 방법으로 세상과 소통해야 한다.

오로지 탁발로 연명하셨던 부처의 수행 방법을 지금 와서 따를 수는 없다. 또 처음부터 귀족불교로 출발한 우리의 전통을 완전히 부정할 수도 없지만 출세간의 큰 결심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려는 대 원력을 세우신 출가 제자들이 사는 절집이 세간의 욕심과 천박함으로 물드는 것은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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