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 떡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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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 떡이냐"
  • 임계재 시민기자
  • 승인 2013.05.06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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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재의 음악놀이터]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코르넷 연주

주말에 거푸 잔치 집을 돌았습니다.
떡 많이 보았지요. 먹는 행동으로 선뜻 옮기지는 못합니다. 말 잘 듣는 모범생 환자는 의사의 경고를 꿈뻑하며 잘 지키거든요.

좋을 리가 없는 몸상태로 빌빌거리다 정신 차리려고 대낮에 TV 켰는데 <브람스 교향곡> 1번이 흘러나옵니다.



시작부터 봤으니(들었으니), 이게 웬 떡입니까?
흐릿하고 낮은 데다 눅진한 하늘을 금관악기들이 맑고도 날카롭게 날고 있습니다.
마지막 악장의 독일민요 주제를 차용한 부분은 저 멀리 오래 전 여학교 시절로 데려가 줍니다.
음악시간에 독일 민요를 번안한 우리말 가사로 노래를 배웠거든요, 그러니 더욱 반갑지요.
갑자기 눈물이 쿡 솟았습니다.

이제는 십 년도 훨씬 넘은 시간입니다.
도무지 병원 밖으로 나갈 희망이 안 보이던 때 그 암담한 다인실(多人室)에는 코딱지만한 TV가 부대시설의 전부였습니다.

몸서리나게 연속극 좋아하는 환자가 새로 들어와 아침부터 온갖 채널을 돌려가며 모든 드라마(그 여인은 꼭 드라마라고 했습니다)를 웬수처럼 봐 댔습니다. 세상에 공중파 채널에 그렇게나 많은 분량이 포진하고 있는 줄을 처음 알았습니다.

갓 마흔 되었다는 그 여인은 딱하게도 신장이 완전히 망가져 더러 드나드는 처지였던 모양이었습니다만 저는 몰랐지요. 이 여인이 퇴원할 때까지 뉴스와 교양프로는 한 번도 못 봤고, 그 시기 도올선생이 늦은 시간 노자의 <도덕경>을 강의해 아침에 못 차지한 TV, 나도 좀 보려는데 ‘밤에 잠 안 자고 시끄럽게 TV'냐고 퉁박을 줘 대는 통에 찔끔하며 그만두어야했습니다. 우스개소리지만 도올의 목소리가 사실 좀 시끄럽습니까, 흐흐.

일찍 내팽개치다시피 갖다 주는 병원 밥, 저는 40여일 금식이니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 하는 식사시간이면 할 일이 없어 커튼 닫아놓고 책이나 볼 밖에요.

혹시 병실과 교도소(전 안 가봤어요)의 공통점을 아시는지요.
오래 있는 환자 또는 죄수가 가장 좋은 창가자리를 차지합니다. 감옥에도 창가가 있는지 모르지만요.
다음으로, 신입이 들어오면 무슨 병이며 담당의사는 누구인가, 거기에 이 병원에 오기 전 어디서 있다가 왔는지 까지를 묻는 겁니다.

고참이 신고를 받으면서 신입에게 무슨 죄를 지었으며 판사는 누구였고 형량은 얼마인지 무서운 목소리로 겁나게 묻는 상황 영화에서 많이 봐 다들 아시잖아요.

억척스러울 수밖에 없는 존재인 어미, 낳지 않은 자식까지 홀몸으로 줄줄이 키우며 자식 입에 밥알 챙기느라 청춘이 사그라드는지, 세월이 흐르는지 살필 겨를 없던 눈물겨운 여인. 그 어미가 머리 굵은 자식들과 부대끼며 뒤늦게 상처입고 아파하던 무렵 첫 사랑인가 뭔가를 만나 사람 사는 맛을 알게 됐습니다.

살만하면 죽어야 하는 드라마 식순에 따라 불치병에 걸렸고, 그 가여운 여인의 모습이 자신들과 환치되었는지 우리 방의 모든 환자는 이 드라마에 열심히 매달렸습니다.
극 내용만큼이나 억척스레 살 수밖에 없던 채소 노점상 아주머니는 어쩐 일인지 앉지도 않고 꼭 서성이다 주먹으로 눈물을 훔쳐대곤 했지요.

고생에 절어 산 형수가 안타까워 어쩔 줄 모르는 시동생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 꺼내기 전 내 쉬던 한숨으로 억장 무너지는 장면을 연기하는 배경음악이 하필이면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간주곡이었습니다. 그것도 맨 날 듣던 관현악연주가 아닌 ‘코르넷’의 연주로 말입니다.




‘시골뜨기 무사’라는 뜻의 오페라에서 두 번째로 흔하게 듣게 되는 이 곡, 일부러는 찾아 들은 적이 없던 그 소리, 그 유행가가 막막하고도 푸근하지만 심란한 코르넷 음색으로 깔리자 그동안 애써 심지 굳은 척, 교양 있는 척, 대범한 척 병실에서 개기면서도 ‘정신과 의뢰’는 안 가겠노라 악착같이 버티던 저의 오기가 무너졌습니다.

링거병이 주렁주렁 너댓 개나 달린 밀대 끌고 변소 가서 코 풀어대며 무지하게 울었습니다.
지금도 코르넷 소리가 들리면 괜히 마음이 울적하고, 쓸쓸해지는 것은 아마도 그 때의 암담함, 수도 틀어놓고 울음소리 삭이던 그 때의 심정을 아직 잊지 못해서인 것 같습니다.
지금 이야기는 근 십 년 전에 써 둔 것이랍니다.

이 드라마 주제가는 우리나라 작품으로 가장 유명하며 여러 번 무대에 올랐던 뮤지컬 [명성황후]에서 초대 명성황후역을 했던 메조소프라노가 불러 더 오래 남습니다.

횡재한 듯 살고 있는 지금, 그저 감사할 뿐이지만 이렇게 날씨가 흐리고 가라앉은 날 생각지도 못했던 음악이라도 들을작시면 이게 웬 떡이냐?고 얼굴이 활짝 펴지기도 합니다만 중환자실에 뛰어 들어와 눈이 빠지도록 울면서, 제발 일어나라고 악을 써대던 수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가끔 감사를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갑자기 가슴이 덜컥 내려앉습니다.

아무래도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라는 뜻 그대로 저는 정신적으로 여전히 ‘시골뜨기 인간’에서 벗어나려면 아직 멀었나 봅니다.

<임계재의 음악놀이터>는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았거나 감동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공간이다. 글쓴이 임계재 선생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면서, 현재 숙명여대에서 중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학창시절, 전공 공부보다는 음악듣기에 더 빠져 있었다는 게 글쓴이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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