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재의 음악놀이터]마르틴 힐의 독일가곡 '멀리 있는 연인'

젊었던 시절, 걸핏하면 바람이 났습니다.
구름, 하늘, 전에는 창경원이라 지칭했고 동물원이 있던 창경궁 동물원의 호랑이에 홀리고 어떤 때는 세검정 고랑을 흐르던 시냇물에 까지도요.

그러면 버스 타고 인왕산 뒤편으로 달려갑니다. 서울이 참 헐렁했었거든요. 지금이야 무지하게 돈 많거나 ‘유명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지만요. 그러다 야무지게 사람에게 반하기라도 할작시면 그게 누구든 가리지 않고 중국의 위대한 정신, ‘민족혼’이라는 칭호가 전혀 과장될 바 없는 노신(魯迅 1880-1936)의 향기로운 단편<고향(故鄕)>을 번역해 막무가내로 손에 쥐어주곤 했습니다.

친구가 저보다 잘 나 보이면 줄 게 없어서. 공부 열심히 하는 후배가 나타나면 신통해서 또 한 번. 개중에는 어쩔 줄 모르게 멋있는 사나이도 물론 있습니다. 적어도 열 번은 될 걸요.

조금씩 세월의 더께가 깊어지며 그 열정은 사그라졌습니다. 그렇다고 걸핏하면 무언가에 반하는 성격 어디 갈까요. 다리 대신 귀로 대체할 것이 제게 무엇이겠습니까, 음악이지요.

해가 설핏 기우는 어스름, 밤과 낮이 섞이는 보랏빛 세상, 거기에 왠지 조금 쓸쓸한 기분까지 스멀스멀 다가들 때면 집어 드는 곡이 [베토벤 가곡집]이고 제일 먼저 고르는 곡은 <멀리 있는 연인에게 [An die ferne Geliebte]>이기 일쑤입니다.


베토벤가곡집에 실린 '멀리있는 연인에게' 자료출처: 유튜브

굉장히 긴 이 노래를 들으면서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이유는 소박했습니다. 이 노래는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어떤 사연을 실어 이처럼 고운 감정을 이끌어내는지를 알고 싶었거든요.

학위 끝나고 서울 남산, 기막히게 좋은 자리 차지한 독일문화원에 등록하려 작정했습니다. 빌어먹게 아픈 ‘대상포진’이나 ‘급성 심근경색’에 치이지 않고 이후에 더 끔찍한 병에 시달리며 고랑고랑 살아내는 현재까지의 상황만 아니었어도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첫 곡인 ‘구텐 나흐트’나 그밖에 ‘당케 쉔’ 정도는 읊고 다닐 텐데 아쉽기 한량없습니다. 지금 저의 게으름과 핑계를 늘어놓는 겁니다.

<쇼생크 탈출>에서 장기수인 모건 프리먼이 교도소 운동장에 울려 퍼진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중 오페라 아리아를 난생 처음 듣고 “그 이탈리아 여자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지만...” 이라고 했던 심정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이해합니다. 그 이야기 나중에 할 게요.
그냥 까막귀로 듣는 겁니다. 좀 못 알아들으면 어떻습니까, 이제 염치없지만 독문과 후배에게 물어야겠습니다.

명증한 피아노 반주에 이어 터무니없이 고운 테너가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잡다하고 시끄러웠던 마음이 평온해옵니다.

원래는 아마 바리톤곡일 겁니다. 실제로도 [베토벤 가곡집]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성악가가 피셔 디스카우니까요. 그 듣기 좋은 구수한 음색에 반하면 ‘딱’입니다.

그런데 제가 테너가수가 부른 노래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니 어긋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삼십 년쯤 전, 생경할 수도 있는, 테너가 부른 LP음반을 구했습니다.

‘어라, 테너가 불렀네.’

턴테이블에 올리니 기막힌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그 속에는 독문학도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마르모트’도 들어있는 겁니다. 그 곡은 중학교 때 번안한 우리말가사로 배웠던 ‘봇짐장사의 노래’였거든요.

노천명 시인도 푸르다고 표현한 ‘5월의 노래(Mai Lied)’에는 봄을 맞은 젊은이의 가슴에 들어 찬 바람기가 가득 담겨있지요.
‘사랑’의 중세어가 ‘생각하다’라는 뜻이었지요. ‘안뎅켄(Andenken)’이라는 곡은 또 어떻고요. 마치 줄 끊어진 진주목걸이 알이 흩어지듯 ‘또르륵’거리는 전주를 듣자면 노래보다 어깨춤이 먼저 일렁입니다.

LP음반은 600번쯤 들으면 소리가 뭉개진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껴 듣습니다.

비엔나 삼총사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외르크 데무스. 이 분의 연주는 ‘피아노를 치는 게 아니라 소리를 뽑아낸다’는 평을 한 분도 있는 차분한 반주를 앞세운 프리츠 분덜리히의 <연인>은 새색시 같습니다.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이는 역시 피셔 디스카우겠지요.

어디 그 뿐인가요, 바리톤가수라면 달려들고 싶은 노래가 이 곡이니 오죽 많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영 갈증이 가시지 않으면 우리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출신의 사색적인 테너 ‘마르틴 힐’의 음반을 조심스레 턴테이블에 올립니다.

여름, 겨울 번갈아가며 자비심 실천하려는 저는 의사들 굶어 죽을까봐(그들은 저보다 훨씬 부자인데도 말입니다.) 입원에 통원치료에 바쁜 척 지냅니다. 그렇게 절절매다보니 기계에 먼지가 앉는지 무슨 음반이 어디있는지도 더러 잊을 때가 있지요.

오랜만에 마르틴 힐의[베토벤 독일가곡집]을 먼지 털어내고 걸어봤습니다.
고악기 전문연주자인 크리스토퍼 호구우드의 포르테피아노, 조금은 둔탁하지만 성실한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이 사나이의 <멀리 있는 연인>이 나였으면 좋겠다는 몹시 깜찍한 꿈을 곁들여서요.

에그머니! 사는 게 엉망이라 스피커 엣지가 나간 것도 몰랐지 뭡니까. 지직거리는군요.
그래도 내친김이니 볼륨 높여봅니다. 연인까지는 아니더라도 요새 그리운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나씩 떠올려보면서 말입니다.

목소리 맑고 노래도 잘하는 우리오빠, 지역이름도 수더분한 순천에서 아이들이 행복한 유치원 꾸려간다는 후배, 재주 많은데 노래까지 잘 하는 사진작가 김아무개씨, 전시회 준비는 잘 돼 가는지 문자라도 날려야겠습니다. 복잡한 관계 리스트 열립니다.

여러분에게 이 봄, <멀리 있는 연인>이거나 무작정 그리워지는 분은 누구신지요?

<임계재의 음악놀이터>는 음악으로 마음에 위로를 받았거나 감동했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공간이다. 글쓴이 임계재 선생은 중국문학을 전공한 작가이면서, 현재 숙명여대에서 중국문화를 가르치고 있다. 학창시절, 전공 공부보다는 음악듣기에 더 빠져 있었다는 게 글쓴이의 귀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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