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 영화 '지슬' 리뷰

 

▲ 영화 포스트"차라리 죽이지 그랬어" 경비대원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면

외로운 대지의 깃발 흩날리는 이 녘의 땅,

어둠살 뚫고 피어난 피에 젖은 유채꽃이여!

검붉은 저녁햇살에 꽃잎 시들었어도,

살 흐르는 세월에 그 향기 더욱 진하리.

아 반역의 세월이여 아 통곡의 세월이여!

아 잠들지 않는 남도 한라산이여!

잠들지 않는 남도   전문  

 

▲ 굴속의 사람들, 롱테이크로 잡은 화면은 마치 살아있는 단체사진을 연상시킨다.

가족사진 혹은 단체사진과 같은 프레임과 롱 테이크, 자막이 없으면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제주도 방언들, 자욱한 연기 때문에 흩어진 사물의 경계, 실루엣만 살린 나무와 을씨년스런 회색하늘의 극단적인 대조, 추위를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음산한 분위기, 신경에 거슬리는 자그러운 칼 가는 소리…….

역사적 혹은 실체적 진실은 차치하고 단지 영화적 수사로만 보아도 안타까움, 분노, 슬픔을 억누르는 듯한 화면과 음악이 느껴진다. 거기에 더해지는 묘한 뉘앙스의 제주도 방언은 1948년 한반도의 남쪽 섬 제주도에서 일어난 비극을, 영화는 침착하게 그러나 매우 강한 어조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狂氣

20세기는 이념의 세기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발발한 볼셰비키 혁명의 바탕이 된 공산주의는 그 뒤 세계 여러 곳에 급속히 퍼지게 되는데 그 원인은 공산주의가 표면적으로는 압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민중들의 염원을 잘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맞선 미국은 그들의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이념을 그들의 영향권에 있는 나라에게 강요하였다.

우리 민족은 1945년 일본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기쁨보다는 얼떨결에 받은 해방이라는 선물을 채 풀어헤쳐보기도 전에 위에서 말한 두 이념의 광풍이 몰아쳤고 일제의 억압을 기억한 민중들은 쉽게 이념화되고 그 이념 때문에 민족적 주체성도, 미래에 대한 합리적 판단과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이했다.

일제에 빌붙거나 그들의 주구노릇을 하던 민족반역자들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은전에 힘입어 하루아침에 미국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사람으로 표변하여 해방된 나라에 다시 경찰이 되고 군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제 강점기 시절 자신의 친일행각을 감추기 위해 자신들의 반민족행위를 기억하는 사람들을 좌익(공산주의자)으로 몰아세워 이들을 적대적인 존재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4.3사건의 기화가 된 사건은 1947년 3.1절 28주년 기념식의 경찰 발포사건인데 단순히 데모대를 향한 경찰의 과잉진압이 아니라 해방이후 일본군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다시 군정경찰이 되어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자신들의 과오를 감추기 위해 다시 제주도민들을 억압하자 이것에 분개한 제주도민들이 거세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데모대가 경찰서를 공격하려하자 이들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이었다. 이것이 3.1발포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지부가 개입하면서 노골적인 좌, 우의 대립으로 사태는 격화되고 미군을 등에 업은 서북청년단(북한에서 일제에 기생했던 지주세력들로서 북한이 공산화 되자 토지를 빼앗기고 남하하여 결성한 반공집단. 따라서 이들은 공산주의자라고 의심되는 자에게는 무조건적인 공격을 가하였다.)들의 무자비하고 잔인한 불순분자 색출작업으로 2500여명의 무고한 제주도민이 고문당하거나 투옥 당하였다. 그러자 남로당도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바꾼다. 이에 초대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 문제를 자신의 정권 정통성의 도전으로 여겨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해 11월까지 제주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만다. 물론 당연히 미군의 지원을 업고 한 일이었으며 친일 부역자들의 절대적인 헌신(?)을 바탕으로 이루어 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민중의 고통과 역사의 오점

영화의 시간적 배경인 1948년 11월에는 이미 제주도의 중, 산간 마을이 거의 초토화된 뒤였다. 영화에 등장하는 순박한 제주도 사람들은 그 난리 통에 겨우 살아남아있던 사람들로서 해안으로부터 한라산 쪽으로 더 깊이 들어간 곳에 살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영화에서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이념도 국가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로지 자신의 가족과 친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오순도순 모여 살던 아름다운 제주도의 순박한 산촌사람들 뿐이었었는데 그들에게 이념의 덫을 씌워 죽인 장본인은 다름 아닌 해방된 나라에서 국민을 위한다던 우리의 정치 권력자들이었다.

물론 그 정치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던 이승만 대통령은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계엄령을 선포했고 불순한 의도로 작성된 미국의 제주도 보고서를 믿고 이제 막 이민족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힘없는 민중들에게 같은 민족의 손에 총을 들게 하고 이념으로 서로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든 뒤 그들에게 총질을 하게하고 또 서로를 죽이게 한,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이 엄청난 비극의 책임은 어찌할 것인가?

▲ 제주도 방언으로 감자를 지슬이라 한다.

따라서 흑백영화인 이 영화의 검은 색 화면은 아마도 온통 핏빛이었을 것이다. 어머니를 두고 피난 왔던 아들이 다시 마을로 내려갔을 때 불탄 집과 처참한 주검으로 누어있던 어머니를 발견하고 오열하지만 그 끔찍한 슬픔 속에서도 동굴에 살아있는 동네사람들을 위해 불탄 집에서 가져온 지슬(감자)을 나누어 주고 눈물 흘리던 장면은 이 영화의 여러 장면 중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아마도 감독은 이것이 민중의 힘이며 무엇으로도 대체 할 수 없는 인간의 힘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영화적 공간에 대한 생각

1948년의 제주는 1945년 해방공간부터 1953년 한국전쟁까지 한국군에 의해서든 미군에 의해서든 저질러진 양민 학살사건의 과정 중 하나였다. 거창, 산청, 노근리, 함평 등 이 나라 곳곳에서 발생한 이러한 양민 학살의 명분은 부역자의 처벌 혹은 빨치산의 토벌이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정치 권력자들이 말하는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순박한 이 땅의 민중들이었다. 국가권력에 의해 무고한 민중들이 죽는 이러한 비인간적 반문명적 사태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공간이 바뀌어도 억울한 붉은 피눈물은 언제나 마르지 않는다. 이런 양민 학살이 1950년대의 이야기만도 아니다. 1980년 광주 또한 정치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의 연속선상에 존재한다.

영화적 배경이 된 제주도의 이름 모를 작은 굴은 이 땅 민중의 삶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장치라고 생각된다. 굴은 어둠의 장소이며 폐쇄의 장소이다. 그 어둠 속에서는 다채로움도, 변화도 사라지고 오직 존재 그것으로 필요 충분하다. 이를테면 굴속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평등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동굴 속에서 서로를 확인하고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의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은 감독이 굴을 중요한 장치로 삼은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후반부에 굴속 동네 사람들이 마치 인터뷰를 하는 것처럼 한명씩 이야기 하는 장면이 있다. 앞쪽에 모닥불처럼 조명을 밝히고 뒷부분은 검게 처리해서 인물을 부각한 이 장면은 마치 각각의 스냅사진을 수평으로 연결한 것처럼 느껴지는데 어둠으로 정지된 굴속 생활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시간적 흐름을 표현하고 또 그 흐름에 따라 사람들 생각의 변화를 관객에게 설명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감독은, 우리들 민중의 삶은 이렇게 순박한데 이러한 삶을 파괴한 권력자들의 만행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함을 영화적 장치로 말하고 있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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