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이성복 시집 "래여애반다라"를 읽고

 

▲ 시집 "래여애반다라" 표지

1. 프롤로그

겨울이 끝나가고 있다. 봄은 분명히 올 것이며, 어느 날 문득 세상은 화사해 질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여전히 황량하고 건조한 겨울의 끄트머리에 있다. 몇 줄의 글쓰기에도 정신을 쥐어짜야 하는 메마른 나의 영혼이 순전히 계절 탓일까만 핑계거리 좋아하는 인간인 나는, 내 영혼의 퍽퍽함을 그저 계절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꿔먹은 뒤 주머니에 깊숙이 손을 쑤셔 넣고, 거의 강박처럼 책을 읽어야겠다고 되뇌며 그저 서점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기만 했다. 왜냐하면, 한 줄의 글귀에도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며칠 동안 혼란스러움으로 보내야 했던 시퍼런 20대도 아니고 '이미 반백이 넘어버린 깡마른 나의 영혼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는 책이 있기나 할까?' 하는 의문과 더불어 '다 그저 그런 소리일 것이라는 지극히 단순하고 편리주의에 함몰된 나의 의식을 깰 수 있는 빛나는 단어는 있기는 한 것일까?' 하는 아주 현실적인 의문까지 일어나고 있으니…….

 

20대 이후로 줄곧 나에게 있어 책 읽기란 '충격적'인 것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왔다. 내 영혼에 아주 작은 흔들림이라도 줄 수 있는 어떤 '충격적'인 단어들, 혹은 주제들에 늘 나는 매혹되었다. 그리고 그 매혹의 원인인 ‘충격’이라는 것을 가만히 분석해보면 나의 무지와 나의 태만함을 흔드는 것들이었다. 그러한 기준으로 읽혀진 책들은 대부분 오래도록 내 속에 남아 끊임없이 나에게 영향을 주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책 읽기를 가능하게 했다. 보르헤스의 말처럼 책이 책을 읽게 만드는 것이다.

 

시는 언어의 정화라는 것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의 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일체의 군더더기를 제외한 사물에 대한 의견이며, 사상에 대한 탐색일 것이다. 물론 시는 시 자체로서 완벽하다. 시인 ‘오규원’의 “내 시 안에서 무엇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마라”라는 말처럼 시 안에서 시 이외의 것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시를 읽은 이후 그것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또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지식과 사상에 눈을 뜨는 것은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1986년, 20대의 나에게 시인 이성복의 '남해금산'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불안했던 그 시절과 모든 것이 불완전했던 나의 삶과 지식, 그리고 나의 생각에 '남해금산'이라는 시집은 굉장한 위력으로 나를 흔들어 놓았다.

 

<序 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읍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읍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 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류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시집 “남해 금산” 이성복

 

서시 중의 다음 몇 줄 때문에 나는 며칠 동안 잠조차 이루지 못하였고 그 뒤로도 오래 내 가슴에 화인처럼 남아, 문득 문득 헛기침처럼 올라오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서시 일부)

 

사랑해보지 않아도. 또 사랑하고 있지 않아도 이 구절을 단지 읽기만 하면, 우리 모두는 사랑의 이미지를 느낄 수 있고 동시에 사랑의 幻影속으로 가만히 걸어 들어갈 수 있다.

 

 

2. 래여애반다라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다시 2012년 이성복이 쓴 시집을 샀다. 이제 60대의 그의 시집은 그의 삶의 무게만큼이나 무겁거나 혹은 가벼워졌고 촘촘하거나 혹은 검불처럼 가벼운 느낌으로 내게 다가왔다. 시집 제목은 '래여애반다라'.

 

향가 공덕가의 일부분이며 뜻은 ‘왔구나, 서럽더라.’라고 일반적 해석을 시인은 이렇게 상세하게 풀이한다. 스스로 당치 않을 것이라고 단서를 달면서.

 

/이곳에 와서, 같아지려 하다가, 슬픔을 맛보고, 많은 일을 겪고, 비단처럼 펼쳐지다/

 

시인이 말하는 이곳은 아마도 이 세상일 것이며, 생략된 주어는 아마 ‘우리’일 것이다. 즉 이 세상에 아무런 예정 없이 온 우리 모두는 세상과 닮아가려고 애쓰다가 세상으로부터 온갖 시련을 겪으며 슬픔과 절망을 느끼다가 마침내 그로부터 어느 정도 무던해지면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것이 우리 삶이라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3. 무사하다. 혹은 무사하지 않다.

매일 똑 같은 곳에서 일어나 다시 똑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일을 길게는 백년 쯤, 어쩌면 그 보다 짧게 반복하다 마침내 흔적 없이 사라져 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사람들의 입장은 사람들 숫자만큼 다양하다. 60이 넘은 시인의 시선은 이전의 눈높이보다 많이 낮아진 느낌이다. 낮아진다는 것은 넓어지고 동시에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그 만큼 다양한 사물에서 시인은 삶의 모습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한바탕 먹고 떠난

식탁 위에는 찢긴 햄버그 봉지와

으그러진 콜라 페트병과

입 닦고 던져놓은 종이 냅킨들이 있다

그것들은 서로를 모르고

가까이 혹은 조금 멀리 있다.

......

하지만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이다.

 

시집- 래여애반다라 중 “식탁” 부분.

 

사소하다. 늘 먹는 우리 식탁위의 하잘 것 없는 음식물을 쌌던 종이 봉지 혹은 페트병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고 그 시선은 우리 삶으로 연결되고 동시에 우리 삶조차 그런 빈 껍질에 불과할지 모른다는 범 우주적인 생각으로 확장된다. 식탁위에 쓰레기로부터 범 우주적인 관점으로의 확대가 그렇게 억지스럽지 않은 것은 시인의 힘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시인의 시선은 안내장의 '절취선'처럼 거의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세밀하거나 혹은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절취선' 에도 시선을 주고 있다.

 

그러나 대개 점선인 것은

실선에는 없는 어떤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면, 실선에는 있는 어떤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시집 - 래여애반다라 중 절취선 부분.

 

무사한 삶에의 욕구는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무사하기 위해 무사하지 못한 일들을 가끔씩 역설적으로 감행한다. 무사하다는 말의 이면에는 절대로 무사할 수 없다는 가정도 깔려 있다. 그러면 그렇게 애써 무사할 필요가 있을까?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이 너무 분명한데 무사한 척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은 그 무사하지 못한 우리 삶을, 어쩌면 무사하다고 최면을 거는 우리 삶을 이렇게 뒤집어 보고 있다.

 

시에 대한 각서

고독은 명절 다음 날의 적요한 햇빛, 부서진 연탄

재와 삭은 탱자나무 가시, 고독은 녹슬어 헛도는 나

사못, 거미줄에 남은 나방의 날개, ...... <하략>

 

명절 다음 날 햇빛도, 연탄도, 탱자나무도, 나사못도, 나방의 날개도 모두 우리에겐 아무 의미 없는 객체일 뿐이며 동시에 이 모든 것이 너무나 무사해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그 모두가 무사해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이 사소한 무사함에 관심두지 않지만 시인은 그들의 무사하지 못함을 느끼고, 그 느낌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여 그것으로부터 우리 삶이 무사하지 않음과 또 무사할 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시인은 이러한 사물들이 무사하지 않음을 느낄 수 있음에 스스로 감사해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4. 불가능

시인은 불가능에 대해 말한다. 불가능이란,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이다. 뿐만 아니라 불가능은 파지할 수도, 규정할 수도 없는 것이며 때로는 그것이 주체가 되어 우리들이 그 속에서 불가능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지어진 시가 '뚝지'일 가능성이 높다.

 

뚝지란 물고기 이름이다. 시에서는 맹목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우리의 삶 역시 실제로 그러하다.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의 주인공이라 여기며 살아가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는 한 마리 뚝지처럼 불가능의 뜻대로, 그저 맹목적인 삶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시인의 시선이 우리 모두를 돌아보게 한다.

 

.......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뚝지 중 2연 끝부분.

 

5. 삶으로부터 혹은 삶을 향하여

여전히 시의 존재가치는 시인의 눈을 통해 삶의 이곳저곳을 아름다운 시선으로 둘러보고 그것을 공유하는 데 있다. 더러는 아프게, 또 더러는 통렬하지만 그 모두가 보통의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시인의 눈을 통해 각각의 대상을, 그들의 목소리로 보고 듣는 것이 곧 시다.

 

무생물로부터 자연현상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여 마침내 시인 자신의 내면으로 옮아가는 주제의식은 마땅히 그래야만 되는 순리나 공식처럼 우리에게 안정된 분위기를 제공한다. 즉 수렴과 발산되어지는 느낌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우리가 전혀 관심두지 않았던 것으로부터 늘 보고 듣는 일상의 모든 것에 대해 시인은 이야기한다.

 

때로는 그 바닥까지, 또 때로는 현미경처럼 세밀하게, 그러다가 우주처럼 넓어지는 시인의 눈으로 파악되어지는 세계는, 다름 아닌 매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이며 그 절대적 중심은 당연히 나와 우리의 삶이다.

 

아무도 빛을 묶어둘 수 없고

아무도 그 몸부림 잠재울 수 없었어

......(중략)

아무도 죽지 않고

다시 태어나지 않는 곳,

 

‘빛에게’ 중 일부

 

푸른 하늘이여, 철없을 때 내가 판 푸른 연못이여

......(중략)

푸른 하늘이여, 철없을 때 내가 잘못 판 푸른 연못이여

 

‘하늘에게’ 중 일부

 

두 시편의 중심은 시인 자신이며 본인의 직관을 통해 객체(자연현상 혹은 자연 그 자체)를 보고 그 객체에게 시인의 삶을 투영시킨다. 이것은 시인의 지나온 삶에 대한 술회일 것이며 혹은 앞으로의 삶에 대한 의지일 수도 있다. 단지 햇빛, 하늘은 그 고백을 들어줄 객체(시인이 부르기 전까지 아무런 사고 작용도 없는 순수한 객체)일 뿐이다.

 

그러다가 시인은 시, 돌, 물, 나무, 어둠, 연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마침내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러한 심경의 변화는 일종의 나이 먹음에서 오는 정리의 습관일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정리의 단계를 넘어 시인이 이룬 스스로의 사상적 철학적 바탕위에 지어진 언어로 된 그것들의 증거를 보여주는 듯하다.

 

특히 그 중 ‘소멸에 대하여 1’을 읽으면서 이 시집에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그리고 시인이 많은 단어와 조사를 엮어 써낸, 그리고 그것들을 이용해 마침내 표현해내고자 하는 그 어떤 것, 혹은 작은 조각들 중 일부를 마치 내 손으로 만지며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소멸에 대하여 1

거실 화장실 수건은 늘 아내가 갈아두는데

그중에는 근래 직장에서 받은 입셍로랑이나

란세티 같은 외국물 먹은 것들도 있지만,

1983년 상주구계서원 중수 기념수건이나

(그때 아버지는 도포에 유건 쓰고 가셨을 거다)

1987년 강서구 청소년위원회 기념수건도 있다

(당시 장인어른은 강서구청 총무국장이었다)

근래 받은 수건들이야 올이 도톰하고 기품 있는

태깔도 여전하지만, 씨실과 날실만 남은 예전

수건들은 오래 빨아 입은 내의처럼 속이 비친다

하지만 수건! 그거 정말 무시 못 할 것이더라

1999년, 당뇨에 고혈압으로 장인어른 일 년을

못 끌다 돌아가시고, 2005년 우리 아버지도

골절상으로 삭아 가시다가 입안이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가셨어도, 그분들이 받아온 낡은

수건들은 앞으로도 몇 년이나 세면대 거울 옆에

내걸릴 것이고, 언젠가 우리 세상 떠난 다음날

냄새나는 이부자리와 속옷가지랑 둘둘

말아 쓰레기장 헌옷 함에 뭉쳐 넣을 것이니,

수건! 그거 맨 정신으로는 무시 못 할 것이더라

어느 날 아침 변기에 앉아 바라보면, 억지로

찢어발기거나 불태우지 않으면 사라지지도 않을

옛날 수건 하나가 이제나 저제나 우리 숨 끊어질

날을 지켜보기 위해 저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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