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오솔길]영화 '클라이드 아틀라스' 리뷰

 

▲ 배우 톰 행크스의 얼굴 문신이 이채롭다.

수미산이라는 산이 있다. 불교의 우주관 속에 등장하는 거대한 산이다. 거기에 중생들이 윤회전생을 한다. 육신이 없어 번뇌도 고통도 적은 천상의 세계(비비상천)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경계를 끝없이 넘나드는 고통의 세계인 지옥의 끝(무간지옥)까지 중생들은 자신이 지은 현생의 업(카르마)에 따라 다음 생이 결정된다. 서양적 사고와는 판이하게 다른 시작도 끝도 구분할 수 없는 원형과 순환의 세계관이다. 아마도 워쇼스키 남매는 이런 동양의 윤회사상에 매력을 느끼고 그러한 사상을 영화적 서사로 표현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들의 의도는 다소 실패한 듯 보인다. 

6편의 조각그림, 그리고 중중무진

시대와 장소, 그리고 이야기의 내용이 전혀 다른 6개의 에피소드를 동일한 배우들이 놀라운 분장을 통해 각자 다른 역할로 연기한다. 이를테면 감독은 어떤 사람이 이렇게 저렇게 다음 생으로 이어진다는 가설을 영화적 문법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에 서양적 휴머니즘이나 디스토피아적 미래관, 그리고 인류보편의 가치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끼워놓고 관객으로 하여금 전체 퍼즐을 완성해보라고 은근히 요구하고 있다. 그 요구에 응해서 전체를 하나로 인식하든 또는 개별의 이야기로 끝내든 그것은 순전히 관객의 몫이다. 하지만 서양인의 시선에서 보는 중중무진의 거대하고 복잡한 원리는 의외로 몹시 간단하게 표현된다. 

중중무진의 섭리는 ‘연기’라는 것에 기초한다. 영화에서처럼 단순하게 어떤 사람이 다음 생에서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삶 하나하나가 마치 고리처럼 다음 생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지만 다음 생은 그 동력 뿐 아니라 그 삶에서 생기는 새로운 ‘연기’까지 부가되어 더욱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는 것이다. 하기야 영화 속에서 이 모든 것을 말 할 수 는 없었으리라. 

감독은, 조각그림 자체가 하나의 완전한 스토리를 갖추고 있고 그 하나하나의 조각그림들이 모이면 큰 그림이 되면서 또 다른 스토리를 만들어 낼 것이라는 기대를 아마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조각그림은 의도대로 관객에게 인식되었지만 큰 그림으로 맞춰보았을 때 그 큰 그림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혹은 발견되는 새로운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영화가 끝난 후에도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분장 기술, 그리고 배우들

컴퓨터 그래픽은 영화의 공간을 무한대로 넓혀 주었지만 최근의 영화가 이 기법을 너무 과용함으로서 오히려 관객의 상상력은 제한하기도 한다. 이 영화에서는 그 CG보다는 실제로 배우 얼굴을 오랜 시간에 걸쳐 분장시키는 방법을 통해 영화적 성취를 이루려 하고 있다. 

주연배우 8명(톰 행크스, 휴 그랜트, 할 베리, 짐 스터게스, 휴고 위빙, 수잔 서랜든, 벤 위쇼, 배두나)은 각 에피소드마다 다양한 분장으로 중복 출연하고 있는데 쉽게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 동안 전혀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완벽한 분장술로 관객의 시선을 따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 뿐, 이 영화의 매력은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었다. 각 에피소드의 스토리는 배우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흔들렸고 이야기의 요점은 애매해 보였다. 영화 도입부, 무엇인가를 강조하기위해 시간과 장소, 인물을 혼란시키는 편집방법은 매우 인상적이었으나 도입부의 충격은 오래 가지 않아 희미해진다. 감독의 jigsaw 유희에 관객들은 이리 저리 헤매면서 뭔가 놀라운 것을 발견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가, 다른 영화에 비해 긴 상영시간(172분)을 보내고 엔딩 크레디트와 분장 장면이 올라갔을 때, 잠시 허탈해지는 기분을 숨길 수 없었다.

 

▲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 서울이라는 배경과 배두나의 어색한 연기

서울, 배두나

감독이 그녀를 캐스팅한 이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만큼 다섯 번째 에피소드 속에 그녀의 연기는 참 어색했다. 물론 복제인간이라는 그녀의 역할이 관객에게 큰 느낌으로 다가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중요한 역이라면 그 상황에 합당한 무언가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복제인간이 아니라 로봇처럼 연기하는 그녀를 보며 조금은 안쓰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2144년의 서울을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있다. 서울의 미래를 이렇게 상정할만한 이유가 감독들에게는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의 서울의 모습에서 미래의 디스토피아적인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이든 감독들의 이런 선택에 대해 좋지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필 서울인가!  

다시 생각해보는 주제

6편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큰 주제를 굳이 찾아본다면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서사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에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되어 신과 인간의 문제를 정의하는 가장 넓은 의미의 '자유의지'를 의미하기보다는 가장 좁은 의미의 '자유의지' 즉, 외적인 강제ㆍ지배ㆍ구속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행위를 선택할 수 있는 의지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주제를 감독은 6개의 퍼즐을 통해 이야기하려 했으나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단지 그들 감독의 지적 유희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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