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카잘스 버전으로 듣다

 

▲ 음반 표지 사진 해로운 담배를 피우고 있는 카잘스

사랑하는 연인이 떠난 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어찌하여 잠이 들고 선잠을 깬 겨울 아침, 그날따라 밖에는 하얀 눈이 쌓여 있는 그 날 아침, 바흐의 무반주 첼로 음악을 듣는다면 당신의 가슴은 온전할까? 아마도 그 큰 활로 당신의 가슴은 베어져 붉은 피를 뚝뚝 흘릴지도 모를 일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에 대한 나의 추억은 지금부터 22년 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겨울날을 떠 올리며 음악을 다시 듣는다.

#1 

그녀와 만난 첫해 겨울방학은 내 삶에서 가슴 아픈 장면 중의 하나다. 왜냐하면 그녀는 방학이 되면 집으로 가버려서 그 겨울 내내 만날 수 없었다. 처음 느끼는 사랑의 절망을 맛보면서 나는 그 겨울 내내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야”라고 되뇌었다. 그리고 바로 이 음악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제1번 사장조 BWV 1007. 전주곡, 알르망드, 사라반드, 미뉴에트, 지그.

파블로 카잘스 버전으로 이 음악을 듣는다(미샤 마이스키 버전이 대중적이어서 많이 음반으로 나와 있다). 첼로 현을 왕복하는 활의 섬유 한 가닥 한 가닥과 그 음률의 변화가 육화되어 심장과 폐부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하지만 음악은 한 없이 부드럽고 유려하다. 전주곡을 넘어서면 알라망드(춤곡)다운 부분도 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첼로가 가진 악기의 특성을 그대로 나타내듯)조용하고 동시에 음울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카잘스는 보우잉을 천천히 함으로서 연주시간이 조금 길고 마이스키는 그 부분을 줄여서 연주시간이 조금 짧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카잘스의 깊이를 더 좋아한다. 물리적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느낌의 문제이므로 마이스키 버전이 경망스럽다거나 또는 지나치게 짧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삶의 호흡처럼 기계적으로 느낄 수 없는 의식의 문제이며 음이 관통하는 공간의 문제라고 생각된다.

첫 소절부터 이 기막힌 연주는 사람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알라망드(보통빠르기)로 연주되는 G현과 C현을 오가는 레가토(이음) 부분은 겨울의 냉기와 너무나 잘 맞아떨어짐을 듣는 순간 누구나 알게 된다. 모두 춤곡의 빠르기로 표시되어 있는 악상기호와는 무관하게 음악은 우리 모두를 내부의 심연으로 아주 깊숙이 내려앉게 만든다.

#2

1월의 어느 날 아침, 천지에 흰 눈이 와 있었고 나는 그 눈에 붉은 그리움의 피를 쏟았다. 그녀와 나의 거리는 300Km, 그 시절 편지외에는 통신수단이 없었다.

제2번 d단조 BWV 1008.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미뉴에트.

유려한 보우잉으로 시작되는 2번의 서주는 애절함을 더하게 하거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결코 그런 추락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 장치를 곳곳에 만들어 놓은 바흐. 두 현을 동시에 연주(글리산도-미끄러지듯)하여 격정을 보이다가도 이내 간결하게 이어지는 음률의 변화는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리라. 눈이 내린 날 2번 전주는 내린 눈만큼 경이롭다. 알라망드에 이르러서는 슬픔의 불협화음에 집중한다. 어쩌면 슬픔의 본질에 대한 바흐의 생각은 불협화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놀랍게도 불협화음조차도 아름답다. 빠르고 느린 반복으로 때론 침잠하다가 때론 가벼움으로 이어지는 오르내림은 현악기가 가지는 자유로움이리라.

#3 

돌연 그녀로부터 이별의 편지를 받은 후 내가 사는 곳이 다른 행성처럼 느껴졌다.  다시 그녀에게로 가서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편지 하면서도 스스로는 당위성을 가지지는 못했다. 왜 이별할 수 없는지에 대해 스스로도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스스로 상처 받기 싫은 이기심이 아니었을까? 

제3번 C장조 BWV 1009.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부레, 지그.

정점에서 최저점으로, 다시 최저점에서 정점으로 오르락내리락 거리는 첼로 현을 따라 우리의 삶은 이어진다. 1번의 주제를 약간 반복하는 것은 음악의 일관성, 바흐 시대 음악의 의무이었을 것이고 뒤 따라 나오는 불협화음들은 시대와의 불화가 아니었을까? 

빠르지 않게 이어지는 첼로 음은 협곡을 건너고 때로 평원을 지나 다시 가파른 고갯길에서 느끼는 가쁜 호흡까지 여행자의 행보를 닮았다. 본질적으로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 삶의 여행은 사라반드에서 좌절을, 부레에서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4 

장벽, 그녀와 나의 장벽. 모든 것이 그 장벽으로 집중되었고 나는 넘어설 수 없을 것 같았다. 장벽 밑에서 그저 울고만 있는 나를, 내가 보았다.

제4번 E♭장조 BWV 1010.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사라반드. 부레, 지그.

저음의 절망을 느껴보라. 절망은 절망을 부른다. 절망은 라르고 혹은 아다지오처럼 느리고 부드럽다. 하지만 절망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다. 희망의 끝은 새싹처럼 여리기 때문에 시간을 필요로 한다. 다시 이어지는 몇 개의 좌절이 끝난 뒤 이제 제법 푸르게 자란 희망의 푸른 잎사귀에 몸을 맡긴다. 디미누엔도 되는 소리의 뒤에 무성한 희망의 잎들을 본다. 다시 정형화된 사라반드가 이어지고 지그로 정돈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절망의 늪에서 희망을 발견해 낼 수 있다. 

#5 

용기가 필요했다. 모든 것을 파기할 수 있는 용기, 사랑하는 그녀를 떠나 버릴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그녀에게로 가는 길이 어려울수록 나는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제5번 c단조 BWV 1011. 전주곡, 알르망드, 쿠랑트, 가보트 지그.  

전체 음악 중에서 가장 철학적이고 난해한 부분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의 데카르트 기치처럼 확실한 것을 추구하는 중세의 바탕위에 신과 인간, 그리고 음악과 가치의 세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결되거나 혹은 경계를 가진다. 아름다운 것은 그 이후의 문제지만 아름다움은 역으로 그 모든 것을 승화시켜 버린다. 승화된 아름다움은 다시 신에게로 봉헌된다. 이 모든 것이 나와 음악 사이에 놓여 있다. 나는 음악을 듣고 이 모든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이 모든 것은 음악을 통하여 나에게로 스며든다.

#6 

그 겨울에 들었던 이 음악의 날카로움은 세월 때문에 많이 무디어졌다. 다시 그 날카로움의 끝을 떠올리며 지금의 사랑을 가만히 본다.

제6번 D장조 BWV 1012. 전주곡, 알르망드, 사라반드, 가보트, 뮈제트, 지그. 

파르티타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서주부터 전체를 아우르는 음악적 기교를 본다. 장엄하고 부드러운, 혹은 예리하고 둔탁한(마르가토), 때로는 정교하거나 때로는 혼란스러운 모든 부분이 나열되었다가 동시에 뭉쳐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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