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영화 '파괴자들' 리뷰

 

▲ 두 주인공 촌과 벤 ⓒ유니버셜픽쳐코리아

"Savage"라는 단어를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시작되는 영화 도입부의 파도와, 함께 흘러나오는 여 주인공의 내레이션, 인간의 소유욕을 비웃는 듯 한 파격적인 세 남녀의 사랑, 범죄영화의 분위기를 가볍게 벗어난 밝고 화사한 카메라의 의도적 과다노출 등이 처음에는 거장의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기대감과 거장에 대한 경외심이 조금씩 줄어드는 느낌이었고 영화 마지막쯤에는 급기야 한숨마저 흘러나왔다.

 

자본주의와 마약

 

21세기 자본주의의 총아 미국을 괴롭히는 마약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마약판매는 단순히 경제 질서를 교란시키는 범죄가 아니라 그 나라 국민의 정신을 파괴하는 무서운 범죄이면서 동시에 반인륜적 행위이다. 따라서 지구상 모든 국가에서 법으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마약을 이용하는 사람은 날로 늘어나고 있으며 그 경제규모도 작은 나라 국가예산과 맞먹는다. 미국은 이런 나라 중 가장 큰 마약 소비시장이다. 자본주의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혼돈과 가치의 몰락은 인간을 극단의 단계로 몰아가는데 그 과정 중의 하나가 바로 마약이다.

 

미국의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는 남미 여러 나라 중 일부 국가는 국가적 산업으로 이 마약을 생산 판매하고 있는데 심지어 그 사업을 통해 번 자금으로 무기를 구매하고 조직을 만들어 정권을 창출하기까지 한다. 이 어처구니없는 일은 미국이라는 초거대 마약시장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심지어 미국은 이런 자금으로 이루어지는 무기구매와 정권전복에 직/간접으로 개입하여 미국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도구로 삼기도 한다.

 

이제는 마약을 미국에서 생산하고 미국에서 소비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영화가 가정하고 있는데 사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마약은 대마초다. 대마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을 채취하는 마(麻)의 잎인데 예전에는 우리 농촌의 주요한 소득원이기도 했다. 이 잎의 마약성분인 THC(델타나인 테트라하이드로카나비놀)는 강력한 진정 환각작용을 일으키는데 이 성분의 함량이 대마초의 등급을 결정한다.

 

엉뚱하지만 새롭지는 않은,

 

촌(테일러 키치 분)과 벤(에런 존슨 분)은 마약상이다. 하지만 자체 공급이 가능한 마약상이며 동시에 생물학을 전공한 벤 덕에 THC의 성분 함량이 매우 높은 고급마약을 파는 업자이다. 이들에게 남미 마약 카르텔이 접근하고 그들 사이의 갈등 속에 다양한 인간상들을 보여준다.

▲ 냉혈한이지만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유니버셜픽쳐코리아

라도(베나 치오 델 토로 분)로 대표되는 냉혈한과 데니스(존 트라볼타 분)로 대표되는 부패경찰은 이런 종류 영화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캐릭터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라도는 잔뜩 무게를 잡고 냉혈한처럼 보이려고 노력하지만 여자 보스 에레나(셀마 헤이엑 분) 앞에서는 쩔쩔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려진다. 데니스는 이쪽저쪽 모두에게 돈을 받고 그들을 위해 일을 하는 전형적 부패경찰이지만 가족을 위해 화분에 꽃을 심고 노후를 생각하는 헌신적이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더욱이 암으로 투병하는 아내를 위해 이 험한 세상의 풍파를 혼자 짊어지고 있는 남편으로 설정되어 있다. 사실 올리버 스톤은 이런 역설적 이고 엉뚱한 장면을 통해 뭔가를 이야기하려 하지만 예전과 달리 목소리는 가늘어졌고 또한 이야기를 그저 입에서 웅얼거리고만 있다. 이것은 감독의 연출방법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감독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상승한 관객의 수준을 감안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오필리아(블레이크 라이블리 분)는 영화 서사의 원인이며 긴장유지의 도구임에도 영화공간에서 그녀의 역할은 지극히 평범하고 단순하게 보인다. 그녀의 연기력도 문제이겠지만 영화 서사의 핵심, 즉 무엇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가에 대한 혼돈이 그 원인이라고 보인다. 분명 이 영화 서사의 중점은 오필리아가 아니라 다양한 인간군상의 모습인데 이야기의 동력은 오필리아로부터 나오게 되는 구조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오필리아로부터 영화의 주제로 옮아가는, 관객을 설득할만한 어떤 장치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그 장치를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니 오필리아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야만성

 

“야만적이다”라는 말은 “미개하다” 혹은 “문화수준이 낮은” 것에 대한 표현이다. 그것에 어떤 가치개입도 없다. 즉 ‘좋다’ 혹은 ‘나쁘다’는 가치를 개입시키지 않는 말인데 이미 우리는 선험적으로 ‘야만’이라 말에 부정적 가치를 개입시켜 바라보게 된다. 아마도 이 영화감독조차도 그런 가치 개입의 문제에 자유롭지 못했던 모양이다. 매우 부정적 개념으로 사용된 “Savage"의 느낌을 영화 곳곳에서 읽을 수 있었는데 21세기 가장 세련된 문화를 자랑하는 자본의 첨단을 걷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 야만이라는 것인지 아니면 남미 마약 카르텔의 행태에 대한 감독의 의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마도 후자에 중점을 둔 것 같기도 하다.

저작권자 © 뉴스사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