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센인의 아픔과 탄식 서려 있는 곳.. 그곳에서 발견한 새 희망

우연히 매스컴에서 歌神(가요의 신)이라 불리우는 조용필씨가 뉴욕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베일에 싸여진 콘서트를 할 예정이라고 연일 언론에서 떠든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그곳이 어딘지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는 철저히 베일에 가리어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후에야 그 행사가 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분들과 또한 좀 특별한 방식으로 진행돼 최대한 누군가를 위해 최대한 배려를 기울인 것 같다라고 해석 할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소록도’다. 나병환자, 한센인, 일명 경상도말로 문디병…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서로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가깝게는 옆에 동료를, 멀게는 같은 나라직장인들, 더 멀게는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경쟁하고 있다. 조금만 뒤를 돌아보고, 조금만 주위를 돌아 보면, 그렇게 미워할 사람도, 그렇게 못난 사람도, 그렇게 잘난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 역사의 아픔을 간직 한 소록도 풍경
내가 소록도를 여행지로 뽑은 이유는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조금은 위선적이고, 상대를 배려하려는 샘물이 말라가고, 조금만 실패해도 마음 아파하는 내 자신에게 채찍질을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소록도는 지형적으로 전라남도 고흥군에 속해 있다. 예전엔 다리가 없어서 사람들의 왕래가 자유롭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소록대교가 놓여져 많은 관광객이 찾는다고 한다. 녹도항에서 불과 1K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 당시엔 우리가 가슴으로 품으려 하지도 않았고, 그들을 강제로 이곳에 이주시켰는데, 지금은 그 사람들을 가슴으로 품기 위해 다리라는 연결고리를 이용해 그때의 죄를 사할려고 하니 늦게나마 다행스럽지 않은가.

어떤이의 ‘소록도는 관광지가 아닙니다’라는 말이 귓전을 때리는 것도 그 섬을 갔다 오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소록대교를 건너 소록도 공동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마을입구로 들어선 순간 바닷바람의 싱그러움이 코끝을 자극한다. 바다의 전유물인 비린내는 어디에서도 맡을 수가 없었고, 잔잔한 파도소리만 귓가에 들려왔다. 제일 먼저 나를 맞아주는 곳은 찻집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남기고간 글들이 테라스에 널부러져 있었다.

연인들, 가족들, 유명가수, 정치인 …. 모두가 다녀간 흔적들을 남기고 갔다. 마치 영역 표시 하는 냥. 그 옆에는 우체국이 보였다. 우체국 앞에 있는 빨간우체통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곳에 아직도 우체통이 있네! 내가 사는 곳에서는 우체통을 본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지금의 소록도는 한센인의 거주지라기보단 그때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한 채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거만한 생각에 일침을 가해주는 공원으로 탈바꿈 되어 있다.

섬 안엔 우체국을 비롯해 소록도 국립병원, 추모공원, 해수욕장, 납골당, 순록탑, 육영수 여사의 공덕비, 한하운 시인의 시비(보리피리) 등이 있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농작물, 산나물, 마늘, 콩 등... 여느 농촌과 비슷하다.

▲ 소록도에 있는 한하운 시인의 시비(보리피리)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예부터 이곳엔 사슴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사슴 때문에 농작물의 피해가 많다는 현지인의 말에 순수함이 사뭇 느껴진다. 다른 곳에서라면 벌써 사슴을 포획해서 한약재로 몸보신용으로 잡아 먹었을 건데 여기사람들은 살상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같이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로 인정한단다. 그래서 이곳이 사슴 ‘록(鹿)’자를 써서 소록도인가 보다.(물론 섬 모양이 사슴을 닮아 소록도라 부른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국립소록도병원까지는 입구에서부터 10분 정도 걸어가야만 볼 수있다. 길 왼쪽으로는 아름드리 소나무가울창했고, 오른쪽으론 바닷가의 절경이 펼쳐지는 것도 잠시.. 곳곳에 세워진 표지판에서 지난날 그분들의아픔을 구구절절이 느낄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육지로 탈출 하기 위해 나무 토막 하나에 의지해 목숨을 담보로 자기가 처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사나이의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전염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어린핏덩이를 강제로 이곳에 보내놓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는 부모의 모습이뇌리를 스쳐간다. 또한 이곳엔 수탄장이라는 곳이 있는데, 말 그대로 탄식의 장소라는 말이다.

병원측에서 전염을 우려해 보호소에 있는 자식과 바깥세상의 부모를 한 달에 한 번 면회를 허락했었는데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길 양옆으로 쭉 늘어서서 바람을 등지는 쪽은 바깥세상의 부모형제와 친지가, 그 반대쪽으론 보호소에 감금된 자식을 세워놓고 눈으로만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고 하니 얼마나 잔인한가?

바람으로도 병균이 옮는다는 그럴싸한 논리에,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지만 서로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부끄러운 역사를 표지판으로 제작해 두어 한눈에 볼 수 있었다.

▲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감염 되지 않는 자식들과 감염된 부모들이 한달에 한번 씩 얼굴만 볼 수 있었던 수탄장
국립소록도병원은 크고 깨끗했으나, 규모에 비해 병원을 방문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아 보였고, 자원봉사 차 와 있는 젊은 대학생들이 눈에 많이 띄는 것을 보고 의학발달의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 젊은이들의 의식수준도 한층 더 높아진 것 같아 보기가 좋았다. 그리고 여기는 우리나라 기독교단체의 성지순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병원을 지나 언덕배기로 올라서면 한센인의 인권유린장소가 본격적으로 하나하나 눈에 띈다. 검사실, 감금실, 그때 당시의 숙소, 납골당, 한센병 치료약의 발전과정과, 한센병을 바라보는 잘못된 인식이 빚어낸 참극을 기록한 전시실 등...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탓에 초창기 이곳에 머무른 한센인들은 노예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었다고 한다. 

소록도에 취임한 1대, 2대 병원장 및 해외 선교사 수녀님들 중 진정으로 이들의 아픔을 나눈 사람도 있었지만 이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그들 위에 군림하여 우상화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동상을 만들게 하고 아침마다 참배하게 해 한센인들에게 많은 원성을 사 끝끝내 죽음을 맞이한 일본인 원장도 있었다고 한다.

국민훈장을 하사받은 오스트리아 국적의 마리안, 마가레트 수녀는 백인의 천사로 이들 주민들에게 기억되고 있었다.

이곳에 와보면 일본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가깝고도 먼 나라인가를 실감할 수있다. 이 모든 것이 나라의 힘이 없어서 그런 것 아닌가 싶다. 검사실에 회부실과 수술실이 딸려 있는데 한센인이 죽고 나면 가족의 동의 없이 무조건 부검을 실시했다고 한다. 한센병을 치유하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고나 할까?

▲ 검시실과 감금실 표지
또한 한센병이 걸린 남자는 거세를 해야만 부부가 같이 살 수 있었다고 한다. 수술대위에서 거세수술을 받기 전 참담한 심정을 글로 남긴 한 청년의 한이 이 공간 구석구석 숨어 있는 것 같다. 수술도중이나 굶주림, 모진 고문, 노동착취로 인해 운명을 달리한 사람이 너무나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엔 일년에 한 번 납골당에서 납골제를 지내 성난 영혼을 달래 주는 추모제를 지낸다고 한다. 착잡한 마음을 뒤로 하고 공원을 걷다 보면 내 눈을 의심할 정도로 아름드리 나무들이 멋지게 가꾸어져 있는정원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조경의 극치라고나 할까.

향나무를 비롯해서 소나무, 침엽수, 산수유나무, 그리고 몇몇 알 수 없는 외국에서 들여온 나무들로 공원이가득 채워져 있었다. 마치 수목원에서나 볼 법한 나무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 그것도 너무나 잔인할 정도로 웅장하고 정리가 잘 돼 있었다. 이 정원을 만들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노동을 착취당했을까.

이곳에 예전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꽤 컸다고 한다. 교회도 있고 성당도 있다. 지금은 옛 학교부지에 공사가 한창이다. 민간인 출입금지 된 곳이 너무나 많았기에 내가 들어 갈 수 있는 곳은 한계가 있었다. 이곳을 관리하는 할아버지 한 분과 우연히 만나 한참 동안 내가 가지고 간 커피와 과일을 먹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었다. 그 분 역시 한센병을 겪었다. 손가락이 부자유스러웠고 검은 선글라스를 착용하여 약간은 사람을 경계하는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행동은 나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배려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이곳 사람들은 아직도낯선 이방인에게 자기의 아픔을 드러내는 것을 몹시 꺼린다는 것을 알았다. 

▲ 소록도에 있는 찻 집 테라스에 남겨진 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치유되어 육지로 나갔고, 여기에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아직도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운 것이다. 이 섬으로 관광객이 몰려들고 한센병에 대한 인식도 많이 바뀌어 사회단체에서도 많은 도움을 주어 살만 하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바뀌어 이렇게 같이 앉아서 커피 마시고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게 예전엔 꿈꾸어 보지 못한 행동이라고 할아버지께서 씁씁한 얼굴로 이야기하셨다. 

내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할아버지에게 이별의 악수를 나누고 또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번 꼭 들리겠다는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하고자 하는 일이 잘 안 풀리고 많은 돈은 벌지 못하고, 외모가 뛰어 나지 못해 주눅 들고, 무한경쟁에서 뒤처져 절망하고, 친구와 동료와 가족을 그리고 이 세상을 원망하는 이들이여, 우리 역사속에 묻혀진 이곳 소록도의 원생들보다는 분명 당신이 더 행복할 것이다.

"현실에 만족하고 미래를 꿈꾸며 주위를 돌아보며 감사의 마음, 나눔의 미덕, 서로를 배려하는 자세를 키워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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