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발표내용 '정책 아닌 립서비스' 수준..달콤한 말로 국민 현혹 말라

▲ 지난 10월24일 한국경제신문이 주최한 '글로벌인재포럼2012'에 참석한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 사진 출처: 박근혜 캠프

집권 여당 대선후보 박근혜의 교육정책에 대한 한탄.

드디어 여당 대통령 후보도 교육에 입장을 표명했다. 우려한 일이었지만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는 않았다. 교육정책이라 했지만 이것은 정책이 아니라 그냥 ‘립 서비스’ 수준으로 보인다. 이것을 정책이라고 발표한 한심한 대통령 후보의 수준도 문제지만 소위 대통령 선거를 위한 정책 기획 핵심 브레인들이 있기나 하는지 모를 일이다. 지금 당장 이 정도 수준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수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최소한 몇 십만 아니 몇 백만은 될 것이다. 그 많은 대학에 있는 학자들이 정치권에 줄을 대려 한다면서 이 정도 수준의 교육정책을 대선공약으로 내 놓은 걸 보면 교육학자들은 거의 줄을 대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그 정책이라는 것을 보자

 

4대 실천과제로

▲소질과 끼를 일깨우는 교육

▲누구에게나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교육

▲우리 교육의 국제경쟁력 제고

▲배우고 싶은 것을 언제든 배우는 평생학습체계 등 4가지를 제시했다.

 

그 구체적 실현 방안으로 여덟 가지 정책을 발표했다.

 

① 학생들의 소질과 끼를 살리는 교육으로 변화

② 교사업무부담 경감과 교원 확충을 위한 교무행정지원 인력 확보

③ 대입부담의 대폭 감소와 대입혼란 방지

④ 교육비 부담 축소

⑤ 대학의 다양화, 특성화를 지원하고 취업지원시스템 대폭 확충

⑥ 학벌사회 타파로 능력중심 사회 구현

⑦ 직업교육 강화로 산업별 전문 인재양성

⑧ 100세 시대 대비 평생학습체제 구축

 

소질과 끼

먼저 ‘소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은 사실 90년대 중반 이후 이미 써 먹은 슬로건이다. 교직에 20년 이상 계신 현장 선생님이라면 이 ‘소질과 끼’이야기는 이미 자주 들어왔던 이야기이고 교육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이 슬로건처럼 “소질과 끼”를 키우는 교육이 작동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이유는 많고 많다. 교육과학기술부에 계시는 행정 관료들의 교육에 대한 몰상식과 아부근성 때문에 이런 식의 정치적 발언이 나오기가 무섭게 교육현장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했던 그들의 노력이 학생들의 ‘소질과 끼’를 얼마나 죽였는지! 또 여전히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 많은 재벌, 부유층, 권력가, 사회의 기득권층들이 그들의 것을 지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취업, 학력, 재력의 진입장벽을 하늘같이 쌓아놓고, 날마다 그 높이를 높여 가는데 허울 좋은 ‘소질과 끼’는 무슨 엉뚱한 말인가? 혹여 그 중에 그들의 입맛에 맞는 혹은 그들을 위해 그 “소질과 끼”를 아낌없이 제공할 한 몇 사람, 어떤 곳에서도 잘 적응하는 몇 사람을 건질 생각이라면 꼭 이렇게 ‘소질과 끼’라고 쓰지 않아도 될 터인데……. 일반 대중들이 소질과 끼를 키우는 동안에 기득권 세력들은 자본의 힘과 권력의 힘으로 실력을 갖추어 영구히 일반 대중을 통제하려는 속셈은 혹시 아닌가? 너무 기우인가? 하지만 현 정권 집권 이후 갈수록 어려워지는 진학과 취업난을 보면 그것이 결코 기우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고 이번 대선에서 당선되면 이 정부를 그대로 계승할 것이 분명한 여당후보의 교육정책에 이 “소질과 끼”가 들어가니 그들의 속셈을 위해 꼭 필요한 말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진정한 ‘소질과 끼’를 키우려면 여당 대통령 후보는 지금 즉시 기존의 지지 세력과 결별해야하고 동시에 스스로 진보적인 행동을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서 말 한 것처럼 이 “소질과 끼”라는 말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맨 앞에 달아 놓은 사탕발림 같은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오래되고 먼지 풀풀 날리는 구닥다리 역사인식과 후보의 아버지를 부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얻은 무형 유형의 정치적 이익을 고스란히 내려놓아야 이 ‘소질과 끼’에 대한 말을 할 자격과 진정성이 부여된다. 그런데 그게 되겠는가? 그러니 이 말은 출발부터 잘못된 말이다.

 

공평?

두 번째의 이야기는 더욱 문제로 생각된다. ‘공평’이라는 말을 썼다. 도대체 그 선거캠프에 있는 소위 이 나라 최고의 브레인들은 뭐 하는지 모르겠다. 단어의 정의에 대해 검토는 없는가? 물론 ‘공평한 기회’라고 했으니 기회가 중심어일 것이다. 하지만 그 앞에 붙은 ‘공평’이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사전적 의미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고름’으로 되어 있다. 자! 뜻을 보니 일단 뭔가 어색하다. 현 정부의 교육정책과 그로부터 비롯된 기회가 그렇게 공평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역사인식에서부터 정치, 사회문제 전반에 걸쳐 우 편향적인 교육이 대부분이다. 최근의 역사교과서 검정에서 불거진 친일적 시대착오적 의견과 이 정부 시작과 함께 시작된 적대적 대북관계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이 정부는 공평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일단 대통령 후보가 공평을 외치니 일단 기분은 좋다. 하지만 기분문제로 끝나고 말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당선이후의 새로운 정부는 현 정부를 계승할 수밖에 없는 인적, 물적 구성을 이미 여당 대통령 후보라는 직함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연일 계속되는 NLL 문제의 거론은 그들이 여전히 북풍으로 표를 얻으려 함이요, 여전히 우편향의 마음을 굳히고 있는데 대통령 후보는 여유만만 ‘공평’이라는 교육정책을 이야기하고 화사하게 웃는다. 그 ‘공평’이 진정 ‘공평’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노동문제는 무조건 노동자의 무리한 요구이고 빈곤층은 게을러서 빈곤해 졌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이 선거 캠프에 즐비하고, 그러한 사람들의 아이디어로 선거를 치르고 당선되면 그 인사들이 정부를 인수 할 것이면서 정말 ‘공평’한 교육을 펼 수 있을까? 쌍용차 해고 노동자는 연일 죽어 나가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고, 철거민들의 처절한 생존 투쟁을 폭력으로 제압한 그들을 계승할 여당 대통령 후보의 교육정책이 ‘공평’이라고 하니 사전을 바꿔야 하는가?

 

국제 경쟁력 제고

다음으로 국제경쟁력 제고이다. 이 정부 초입 대통령 인수위의 ‘오렌지’에 대한 영어 발음이 지금도 귀에 쟁쟁한데 다시 국제경쟁력 교육을 외친다. 국제경쟁력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의 양성일까? 아니면 국제적인 장사꾼의 양성일까? 또 아니면 미국 전문가들을 양성하는 것일까? 지금까지 우리의 국제화 교육은 이 범주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국제경쟁력 교육은 당연히 해야 하는데 그것이 무슨 문제인가? 문제는 현재 이 정부의 국제경쟁력 교육을 계승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진정한 국제 경쟁력 제고를 위한 선결조건은 천민자본주의 경제논리로부터 우리의 교육을 분리하는 것이다. 진정한 국제경쟁력이란 우리 민족의 내부적 역량을 강화하는데 있고 그 내부적 역량은 돈 몇 푼으로 환가될 수 없는 깊이와 성찰의 교육에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교육이 이런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뜨거운 프라이팬처럼 달궈진 경쟁의 장에 아이들을 내몰아 놓고 누가 더 성과를 내는가, 혹은 누가 더 효과적인가를 따지고 있으며 그 시험에 통과하는 것을 경쟁력으로 생각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교육의 장이 현재의 우리 교육의 실상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바꾸고 진정한 경쟁력으로 나아가려면 그 뜨거운 경쟁의 프라이팬을 걷어야 하는데 현재의 기득권층이 그 일에 찬성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지키기 위해 불법과 편법을 서슴지 않는 그들인데 이 사실을 보통의 우리가 알게 되면 곤란하다. 그래서 아이들을 끊임없이 경쟁하게 하고 그 경쟁의 피곤함에 지친 우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틈을 이용하여 그들은 자신의 것을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취업난, 비정규직 문제, 정리해고 문제, 구조조정의 문제 등이다. 따라서 국제경쟁력 제고를 진실로 교육정책의 기조로 생각한다면 현재의 모든 기득권 세력과 절연해야 하고 그들을 감시하고 그들에게서 경쟁을 가장한 눈가림이라는 그 오래된 악습을 폐지해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이 말에 최소한의 진정성은 부여될 것이다.

 

학벌사회 타파, 능력중심 사회 건설

일단 멋지다. 이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하지만 이렇게 될 수 없도록 할 것 같은 후보가 이 정책을 천명한다. 그래서 한 숨이 먼저 나온다. 그럼 왜 한숨이 나오는가? 먼저 학벌의 타파에 대해 생각해 보자. 학벌이라는 말 자체가 가지는 집단성과 당파성이 먼저 참으로 싫다. 이 나라를 지역성, 학벌로 분리 혹은 계급화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저들의 정치적 이익을 챙긴 사람들이 바로 현재 대통령후보의 아버지로부터 심화되었는데 드디어 딸에 의해 그 정책이 깨어지려는 국면에 있다.

 

그 이후의 정치세력들도 모두 이 학벌을 강화하는 정책을 폈고 그 덕에 학벌은 곧 신분이 되어버린 사회가 되었다. 학벌은 마치 리모컨처럼 사람들을 조정할 수 있게 하고 유, 불리에 따라 움직이는 거대한 덩어리이므로 정치집단에게는 너무나 좋은 도구이다. 더욱이 머리가 좋은 학벌일수록, 지역과 결합된 것일수록 조정이 쉬운데 적당한 유인책만 있다면 쉽게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시키는 대로 하는 멋진 존재가 학벌이다. 이것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인데 가끔씩 언론(동아일보 10월 31일자 스토리 & - 지방대 출신, 아이엄마... 세계를 놀라게 한 그녀)에서는 그렇지 않은 예를 뻥튀기하여 마치 이제는 학벌 중심의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식의 헛된 믿음을 심어주기도 한다.

 

26년을 교사로 살아 온 필자의 눈으로 볼 때 이 사회 곳곳에 여전히 학벌사회는 건재하고 있으며 오히려 현 정부 들어서는 학벌이 정치, 경제, 문화 전 영역에 골고루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본다. 누누이 말했지만 당선이 되면 이 정부의 후계자가 될 것이 너무 당연한 집권 여당의 대선후보가 이러한 상황을 감추고 학벌타파를 주요한 교육정책의 기조로 들고 나온 것은 앞뒤가 너무 맞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식의 말로 국민을 현혹하는 것 같아 몹시 불쾌하기까지 하다. 이제 우리 국민들은 예전만큼 어리석지 않다. 최소한의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으며 어떤 세력들이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더 나은 미래를 가져다 줄 것인가를 비교적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예전의 사람들에게 했던 이런 이야기를 모순덩어리의 사람들이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 행동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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