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 영화 '피에타' 리뷰
감독의 시선, 또는 개인적 회한
지구상 거대도시가 다 그러하듯이 인구 1100만이 사는 초거대도시 서울시의 뒷모습은 처절하고 어둡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전히 이 어두운 서울의 뒤편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또 밤을 보내는 서울시민이 적어도 몇 백만 이상이며 그 중 몇 십만은 이 영화의 삶에도 미치지 못한다. 무섭지만 현실이다. 그리고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며 또 해결할 의지를 가진 사람들도 없다. 거대한 자본의 시대에 그 가난은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일 뿐이며 그것으로부터 생기는 문제 또한 온전히 개인이 떠안고 가야하는 문제일 뿐이다.
영화의 주인공 강도(이정진 분)는 채권추심업자다. 그것도 상해보험을 가입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그 상해를 발생시켜 보험금을 받아 빚을 갚는 잔혹하고 악랄한 추심업자이다. 그런 일은, 그 일을 하는 당사자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상대방의 인간성도 동시에 파괴한다. 감독의 시선은 그 파괴된 인간성에 초점을 맞추고 그것들을 형상화해내는 장치로서 “날 것”, 이를테면 ‘장어’, ‘살아있는 닭’이라는 시퀀스를 이용하여 ‘강도’의 정신세계와 존재감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감독은, 다행히 관객이 그것으로 봐주면 좋겠다는 약한 기대감은 있으나 아니어도 좋다는 느낌 역시 동시에 감지된다.
혈연 또는 악연
어느 날 강도에게 어머니가 나타난다. 새로운 인물의 등장, 그것도 30년 이상을 버려두었다가 문득 나타난 어머니에 대한 강도의 저항은 매우 어설프다. 몇 가지 통과의례를 거치고 강도는 문득 자신에게 다가온 사태를 인정해버리고 만다. 어쩌면 그에게 간절했던 것은 누군가와의 소통이며 안식처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쉽게 그 상황을 인정한 강도는 변화를 보인다. 하지만 그 변화는 안타깝게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상황의 전개가 어색하다. 하지만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 정말 사소한 자극에도 너무 쉽게 무너지는 것이 인간 아닌가? 하물며 혈육이라는데 그것도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라는데. 그것으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도 그리 힘든 일은 아니다.
어머니 미선(조민수 분)은 혈연이라는 질긴 인연의 끈을 통해 강도를 묶어버린다. 그리고 그녀는 아주 쉽게 자신의 뜻대로 강도를 움직이고 알 수 없는 그녀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 삶의 희망을 잃었다는 것과 삶에 희망을 가지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삶의 희망이 곧 삶의 의지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미선의 행동을 이해 할 수 없다. 그녀는 삶의 절망을 힘으로 삶을 이어가다가 스스로 삶을 끝낸다. 스스로의 생명과 혈연과 악연의 끈을 도구삼아 복수를 도모하는 그녀의 삶은 기괴한 욕망과 절망의 쌍곡선이다.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이념, 의미, 구조
더 이상 우리는 김기덕의 영화 속에 머리를 디밀고 이념이나 의미 혹은 구조를 찾으려 두리번거리지 말자. 그의 영화는 그것 자체, 즉 ‘날 것’ 자체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그가 영화를 만드는 이유일 것이고 그의 영화가 평가받는 이유일 것이다. 감독에게 자본주의의 거창한 이념도, 혈연의 끈질긴 악연도, 모순된 사회구조나 이미 회생 불가능한 최빈곤층의 자본에 대한 억압의 구조도 단지 언어의 유희일 뿐이다. 그가 보고 그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피사체는 그의 경험으로부터 그의 감각으로부터 출발하고 그것은 단지 ‘날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