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동유럽 여행기1. 헝가리 부다페스트

어디론가 떠나기로 마음먹는 순간, 언제나 기대와 걱정이 교차한다. 국내 여행도 아니고 이 땅을 넘어 멀리 유럽으로 떠나는 여행을 앞두고 며칠 동안 이러한 감정들로 괜스레 복잡해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을 떠나고 보니 이 모든 감정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아내는 꽤 오래 전부터 이 여행을 준비했는데 여행지의 선정과 정보를 꼼꼼하게 노트에 적기도 하고 인터넷의 사진들을 출력해서 거의 책이 될 정도로 만들었다. 아내의 노력 덕에 여행지에서 혼선을 일으키지 않고 좋은 여행을 할 수 있었다. 언제나 아내의 수고로움에 감사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예외는 아닌 듯하다.  

우리의 여정은 프랑스 드골 공항을 거쳐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는 비행기로 나머지는 유레일 트라이앵글 패스(헝가리-오스트리아-체코)를 이용하고 최종 체코의 프라하에서 비행기로 우리나라에 돌아오는 9박 10일의 코스였다. 3국(도시) 3일의 일정은 지나고 보니 꽤 효율적인 일정으로 생각된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파리 드골 공항에 내려 부다페스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 안에서 꽤나 먼 길을 걸어갔는데 환승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은 다리품을 파는 것과 함께 날아가 버렸다.

▲ 공항 로비에서 바라다 본 파리 드골 공항
우리나라에는 아직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따서 만든 공공기관, 혹은 건물이 없다. 드골 공항은 그런 점에서 조금 부러웠지만 인천공항과 비교해서 비효율적 공항설계로 인하여 여행자를 피곤하게 하는 점은 개선할 점으로 보였다. 곳곳에 공사를 하는 중이었고 더욱이 돌아오는 날에는 테러범이 설치한 폭탄이 있다는 정보 때문에 하마터면 비행기를 타지 못할 뻔 했다.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살다보니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프랑스라는 나라의 관문으로서 드골 공항은 유쾌한 기억을 주지는 않았다.

부다페스트에 내린 시간은 오후 7시, 저녁으로 가는 시간이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가는 공항버스(7인 승합차)에서 주위로 보이는 헝가리의 처음 느낌은 우리나라 70년대 후반 도시의 느낌이었다. 내가 10대였던 그 시절 대구나 부산에서 본 도시외곽이 가지고 있는 황량한 느낌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정해진 루트대로 정해진 가이드가 안내하는 여행은 사실 여행이라기보다는 견학에 가깝고 그 견학의 뒤끝은 늘 불만족이거나 혹은 못마땅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여행을 꿈꾸었고 마침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고 보니 걱정은 더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스스로 관광에 대한 욕심을 내지 않고 편안해지려고 노력하며 부다페스트의 둘째 날 아침을 맞이했다.

중세, 그리고 현재

아침, 호텔을 나와 거리로 나섰을 때 부다페스트는 고색창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글에서 읽고 사진에서 본 그 모습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건물과 거리는, 먼 이국 여행자의 가슴을 뛰게 하기에 충분했다.

▲ 중세로 돌아 간 듯 이국적 부다페스트 거리
거리로 나선 우리는 즐비한 중세풍의 건물과 묘한 이국의 느낌을 만끽하며 알 수 없는 거리를 그냥 걸었다. 가까운 곳에 우리나라로 치면 부다페스트 중앙시장에 해당하는 시장이 있어 들렀더니 분주한 아침시장의 분위기가 있었지만 우리와는 몹시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와 비슷한 야채와 과일을 보니 여기도 우리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임을... 우리와 좀 다른 것은 소시지와 훈제육 등 육류가 즐비했다는 것. 이 곳 사람들의 큰 덩치가 바로 저 음식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훈제나 소시지는 소금이 많이 가미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여행 내내 몇 군데를 제외한 동유럽의 음식은 몹시 짰다.

▲ 시장 안 과일가게
▲ 많이 다른 육류가게

아내와 나는 사전에 계획한데로 부다페스트의 옛 성 위에 있는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 그리고 가능하다면 부다 왕궁가지 들러보기로 마음먹고 길을 나섰다. 버스 혹은 트렘(경전철)노선을 모르는 관계로 부다페스트 도시투어 '호프온 호프오프'라는 투어버스 티켓을 발급받아 그 버스를 타고 정해진 장소로 가는 약간의 편법을 썼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이 방법은 굉장히 유용했는데 도시 이곳저곳을 헤매지 않고 유명한 장소로 바로 데려다 주는 좋은 방법이었다.

부다페스트는 부다와 페스트가 합쳐진 이름이다. 도시 중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다뉴브 강 양쪽으로 중세의 모습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고 그 알 수 없는 건물들 사이로 먼 이국의 여행자는 약간의 놀라움, 그리고 신기함을 가지고 걷고 또 걸었다. 다뉴브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은 그들의 예술혼과 그들의 기술이 조화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으며 그 모든 것이 첫날 내게는 그저 충격으로 다가왔다.

▲ 평화로운 다뉴브 강

성당, 그리고 조형예술

서양문화의 전통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유럽 전역에 산재해 있는 오래된 성당이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가장 이름있고 큰 성당은 다뉴브 강을 중심으로 도심 쪽에서는 성 이스트반 성당일 것이고 갤레르트 언덕쪽으로는 마차시 성당일 것이다. 우리 부부는 먼저 다리를 건너 갤레르트 언덕위에 자리하고 있는 마차시 성당에 먼저 가보기로 했다.

'호프 온 호프 오브' 버스를 타고 부다페스트의 거리를 천천히 달리며 본 것은 거의 비슷하게 생긴 건물과 곳곳의 광장과 그리고 곳곳에 서 있는 동상들이었다. 서양문화가 가지고 있는 외향적 조형성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이렇게 막상 눈으로 보면 그 성향에 대해 동양인인 나는 사실 조금 질리는 느낌마저 드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문화상대주의 입장에서 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면 그 자체로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 곳곳에 이런 알 수 없는 동상이 서 있었다. 그들에게는 모두 다 중요한 사람들이겠으나 이런 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나로서는 그 동상이 그 동상이었다.
▲ 헝가리 영웅들을 모아 놓은 광장.

언덕에 다다르니 백색의 대리석으로 깍아 만든 첨탑이 우뚝한 마차슈 성당이 보인다. 화려하다. 14세기 후반에 후기 고딕 양식으로 건조된 것을, 1479년에 마차슈 1세에 의해 개축하였는데, 높이 80미터의 첨탑을 증축하였고, 19세기 후반에 광범위하게 수리된 것이다. 700년 동안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의 풍요로움과 비극의 상징이기도 했다.(성당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 부다페스트가 함락되고 이 성당은 150여년 동안 모스크(회교사원)로 사용되었다.)

이 성당을 다시 본래대로 되돌려 놓은 이가 마차시(슈) 황제 였고 그것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더불어 이 성당에서 합스부르크 왕가 최후의 황제 칼 1세를 포함하여, 거의 모든 역대 헝가리 국왕의 대관식이 행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니 놀라운 조형 예술의 세계가 펼쳐진다. 동양, 그것도 은근함과 내재적 아름다움을 최고로 여기는 대한민국에서 온 나는, 그저 놀라운 화려함에 셔터만 눌러대며 이 세계를 이해하려 했다.

▲ 마차시 성당 전경. 회백색의 석회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건물로서 멀리서도 눈부실 만큼 빛났다.

▲ 네오 고딕 양식의 내부. 로마네스크 양식의 그림자도 있다.
▲ 성당 내부 2
▲ 내부 상세 사진. 조형성은 물론 신을 향한 인간의 놀라운 헌신을 본다.
▲ 십자가와 예수
고딕 양식을 약간 변형한(네오 고딕) 이 성당의 내부모습은 화려함과 놀라움 그 자체였다. 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여행지의 성당에 비하면 이 성당은 그리 놀랄만한 곳은 아니었지만 처음 느낌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심지어 기둥 하나하나마다 스민 그들의 조형성에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 기둥 조차도 이렇게 화려한 조각으로 만들었다.
성당을 나오니 어부의 요새가 보인다. 어부의 요새란 네오 로마네스크와 네오 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혼재된 건물로, 1899년에서 1905년 사이에 지어졌다. 헝가리 애국정신의 한 상징으로 19세기 시민군이 왕궁을 지키고 있을 때 도나우강의 어부들이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을 막기 위해 이 요새를 방어한 데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돌의 재질이 모두 흰색의 석회암으로 만들어져서 100년이 넘은 건물이지만 새 건물처럼 화려하다.

▲ 어부의 요새
▲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다 본 부다페스트와 헝가리 국회의사당
어부의 요새에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의 광경은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중앙에 보이는 붉은 돔 지붕의 저 건물은 헝가리 국회의사당이다. 내려오는 길에 성벽위에 외롭게 조각되어 있는 사자는 부다페스트의 과거와 현재를 모두 알고 있다는 듯 말이 없다.

▲ 어부의 요새를 지키는 외로운 사자

또 하나의 조형예술 , 다리

부다페스트를 가로지르는 도나우 강위에 걸쳐져 있는 다리들 또한 서양의 조형예술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멋스러움이나 실용성이 잘 조화됨은 물론이고 거기에 상징성까지 더해 다리만으로도 충분히 이 도시를 아름답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텔에서 처음 나와 본 다리는 요제프 다리(일명 자유교)였다.

▲ 요제프 다리 일명 자유교

그 다음으로 본 다리는 에르제베트 다리였는데 헝가리어로 에르제베트라 불린 여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였던 합스부르크 제국의 프란츠 요셉1세(재위 1848~1916)의 왕비 엘리자베스(1837~1898)이다. 사실 그녀는 마쟈르인의 연인인 동시에 유럽의 연인이기도 했다. 앞으로 여행할 오스트리아 비인에 그녀가 살았던 쇤부른 궁전이 있다.

▲ 에르제베트 다리

그 다음 다리가 세체니 다리다. 이 다리는 앞의 두 다리보다 훨씬 더 멋스럽고 웅장하며 조형성이 뛰어나다. 다리 건설을 주도한 세체니의 이름을 딴 이 다리는 조형성과 실용성을 모두 갖춘 예술품이자 실용적인 구조물이다. 다리 입구에는 규모가 꽤 커 보이는 사자상이 있는데 사자의 혀에 대한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 온다. 준공식장에서 사자상을 본 한 아이가 갑자기 "아니, 사자 입에 혀가 없잖아!"라며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아이의 말에 너무도 자존심이 상한 조각가는 그만 그 자리에서 다뉴브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말았다는 얘기가 전해온다. 혀가 있든 없든 지금도 사자는 포효하는 모습으로 거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 멀리서 바라다 본 세체니 다리
▲ 세체니 다리를 지키는 사자 상

놀라움과 새로움의 연속이었던 부다페스트 2일째가 이렇게 지나갔다.
(계속)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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