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생의 오솔길] 영화 "헝거게임" 리뷰

이 정부 들어서면서 시작된 언론의 변화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문득 이 영화가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  그 글을 올려본다.

▲ 영화 "헝거게임" 포스터

2009년 7월 22일은 이 땅에서 생기지 말아야 할 미디어법이 탄생한 날이다. 그 날의 입법으로 말미암아 탄생한 것이 종합편성채널인데 종합편성채널, 즉 종편이란 드라마·교양·오락·스포츠·뉴스 등 모든 장르를 편성하여 방송할 수 있는 채널이며 모든 장르를 편성한다는 점에서는 지상파와 차이점이 없으나 케이블TV(유선텔레비전)나 위성TV를 통해서만 송출하기 때문에 가입한 가구만 시청할 수 있고 24시간 종일 방송과 중간광고가 허용되는 채널이다.

이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문제는 이 종편의 주인들, 이를테면 이 땅의 여론을 주도하는 거대 언론사, 그것도 스스로 보수우익을 표방하는 거대 언론이 장악하고 있는 이 종편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이 영화“헝거게임 : 판 엠의 불꽃”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다소 과장된 기우를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지울 수 없었다. 

설득 없는 ‘헝거 게임’

민주주의의 좋은 점은 국민의 의도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정치에 반영되는 구조로 조직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구조가 있음에도 국민의 의도는 흔히 오도되거나 꺽여지는 것이 다반사인데 이 영화 “헝거게임”에 등장하는 나라는 아예 처음부터 이런 구조가 없다. 국민의 의도는 지배자에 의해 철저히 통제당하고 그들은 그 상황을 수긍하고 살아간다. 참으로 이상한 구조의 나라다. 더욱이 여러 개의 구역으로 나눠진 나라 안에서 각각의 구역이 가지는 사정은 너무나 많은 차이가 난다. 동시에 수도 집중의 경제상황은 지금의 우리나라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몹시 불편했다.  

종편채널 뿐만 아니라 지상파에서도 심심찮게 나오는 서바이벌 게임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 상황에 대한 대리만족을 주는 것을 방송의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영화의 얼개는 서바이벌 게임이다. 단지 실제상황이며 또한 그 대가는 목숨일 뿐이다. 왜 서바이벌 게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영화적 설명은 거의 없고 단지 영화 서두의 한 줄 설명 “반란에 대한 반성의 징표로 헝거게임을 한다.”라는 것뿐이다.  

12구역으로 나누어진 이 나라의 전역에서 구역 당 2명을 추첨하여 생존게임을 한다는 다소 어처구니없는 원작의 설정을 그대로 옮겼으나 원작과는 달리 촘촘한 설명이 없으니 처음 관객들은 그저 뜨악할 뿐이다. 여자 주인공 캣니스(제니퍼 로렌스 분)의 슬픔과 분노, 그리고 생존에의 열망은 비교적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영화 초반부는 서바이벌 게임의 당위성을 설명하고 그것에 대한 관객의 동의를 구해야 함에도 무분별한 클로즈 업 화면으로 남자 주인공 피타(조쉬 허친슨 분)와 캣니스의 심리변화를 묘사하려다가 오히려 영화의 흐름을 놓치고 있는 듯 보였다. 물론 노련한 배우 우디 헤럴슨(히이미치 역)이 적절하게 땜질을 하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으로 볼 때 뒷부분과는 너무나 느슨하고 늘어지는 느낌이다.

미디어, 그 광포한 구조와 정치 

대중에게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는 가를 그 방송을 보는 시청자들은 거의 모르고 있다. 또 광고주의 이목을 끌기위해 우리의 연예인들은 얼마나 피눈물을 훌려야 하는가에 대해 보통의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 이 영화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는 생존게임의 장면들은 흰색 제복을 갖춰 입은 수십 명의 사람들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된다. 마치 T. V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스텝들처럼 출연자의 위험을 조정하고 환경과 상황을 통제한다.  

예전의 영화 트루먼 쇼의 스튜디오처럼 완벽히 통제되는 상황 속에 출연자들을 투입해서 그들의 목숨을 가지고 게임을 하며 그것을 나라 전체에 제공함으로서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 나라 권력의 핵심인 스노우(도날드 서덜랜드 분)에 의해 조정되는데 이러한 시스템, 즉 정치와 미디어가 동일한 구조에서 움직이는 미래의 디스토피아적 발상은 사실 현재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유추되었음이 분명하다.  

더 무서운 것은 죽음의 생존게임이 드라마처럼 낱낱이 전 국민에게 생방송되고 있으며 사람들 대부분은 그것을 보고 즐긴다는 것이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들의 부모 형제를 제외한 나머지에게는 단지 실감나는 게임이며 동시에 짜릿한 대리만족인 것이다. 또 그 방송의 해설과 이것을 주제로 한 쇼의 사회자인 시저(스탠리 투치 분)의 인기는 이즈음 우리 방송가에서 회자되는 유명 사회자의 인기를 넘어 거의 권력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리고 있다. 무섭다. 

이런 생존 게임을 보며 대중들은 즐기고 그것을 이용하여 지배 권력을 강화하는 미래의 디스토피아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그런 영화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출연자들은 그 사회의 범죄자들이거나 혹은 그 사회의 반체제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그 체제는 무너지고 자유가 온다는 해피엔딩에 우리는 익숙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아주 어린 아이 루(아만들라 스텐버거 분)를 비롯하여 거의 대부분이 선량한 청소년들이라는 것이다. 더한 것은 게임이 끝나도 여전히 그 체제는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전의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우리에게 더 충격적인 메시지를 주는데 선량한 청소년을 출연시키는 것은 사람들의 흥미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있다는 미디어의 속성과 그 속성을 자양분으로 독버섯처럼 자라는 정치권력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이론 

경제학적인 의미에서 게임이론은 제로섬(더해서 ‘0’)이다. 그런데 이 이론의 바탕은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 영화의 상황을 출연자들의 전쟁 상황(물론 전지전능한 자들에 의해 통제되지만)으로 본다면 서로를 죽여야만 자기가 살아나는 절체절명의 순간, 각 출연자들은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생존의 방법을 찾아낸다. 그런데 그 방법들 중의 하나가 ‘연합’이라는 의외의 결과로 나타난다. 이것은 각자의 일정부분 포기하는 것으로 게임이론의 원칙인 합리성을 살짝 위반한 것인데 이런 상황의 배경은 바로 각 출연자들에게도 인간이 가지는 연민과 동정, 그리고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상황의 완벽한 통제와 조정에도 불구하고 게임 통제자의 설계와는 다른 결론이 도출될 즈음 통제자는 다시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무리수를 쓰지만 이 방법에 다시 인간이 가진 가장 우수한 감정, 즉 사랑이 개입됨으로서 게임의 통제자는 스스로 백기를 든다. 이러한 영화에서의 생존게임은 부분 부분의 과정으로 본다면 게임이론의 방향을 조금씩 벗어나는 것도 없지 않으나 거시적으로 볼 때 완벽한 게임이론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여자 주인공 캣니스. 현재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어색한 사랑이야기 

캣니스와 피타의 사랑은 피타의 짝사랑이었는데 상황이 전개되면서 점점 서로에게 절실한 것으로 발전해 나간다. 하지만 캣니스에게는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이 있으며 그로부터 마음이 멀어지지도 않았다. 영화 끝 부분에 캣니스의 대사가 이 상황을 설명해준다. “지나간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라고 피타에게 말하는 부분이다. 이런 설익은 사랑의 구조는 원작소설에서는 좀 더 잘 묘사되어 독자에게 이해를 주지만 영화는 그것을 보여주는 것에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영화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랑’이라는 비교적 가치 있는 주제를 소홀히 다뤘다는 생각이 든다. 캣니스와 피타의 유대가 관객인 우리에게도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느낌을 준다. 또한 캣니스의 연인 게일(리암 헤스워스 분)의 비중조차 너무 작아 캣니스와 그의 오랜 사랑에 대해 관객들은 거의 느낄 수 없으니 피타와의 느낌도 게일과의 느낌도 둘 다 어정쩡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이들 세 명의 좀 더 절절한 사랑의 느낌을 관객들에게 줄 수 있었다면 영화는 더욱 짜임새를 가질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오래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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