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삼천포 12차농악에 한 평생을 바친 '박염' 선생

진주 삼천포 12차농악 박염 선생

진주 삼천포 12차 농악의 거두 박염(69세) 선생님. 국가지정중요무형문화재 제11-가호(91년 지정)로 현재 진주 삼천포농악보존회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박 선생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삼고초려’를 해야 했다. 바쁘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거절했던 그는 3번의 전화 끝에 비로소 인터뷰가 성사됐다. 박 선생님은 10년 넘게 기거하던 남양동 에 소재한 진주 삼천포 12차농악 전수관을 나온 뒤 지금은 진주 남강다리목에 있는 국악 연구소로 주거지를 옮겼다.

박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였던 1941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원자폭탄이 떨어져 일본 패망의 직접적인 단초가 됐던 히로시마의 인근에서 살았던 그는 부모님과 5남매 모두 피난길에 올라 다행히 살아남았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이 폭발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조센징 다 죽인다”라는 소문이 재일 한국인 사이에 퍼지고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별이 갈수록 심해져 어쩔 수 없이 가족 모두가 고향인 사천으로 귀향해야 했다. 박 선생님이 6살 때다.
 

박염 선생

“설날 전에 동네에서 어른들이 농악을 하는 걸 봤지. 처음 봤는데 신기하더라고. 그래서 따라했지” 초등학교를 갓 졸업할 때 쯤, 동네에서 농악을 처음 보았던 그는 남녀가 첫 만남에서 사랑의 불꽃이 튀듯 농악에 홀딱 반해 버렸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처럼 어깨 너머로 배웠던 농악은 어느새 동네 어른들이 “재주가 있다. 소질이 있다”고 칭찬을 해 줄 정도로 실력을 인정을 받았으며 그 이후부터 농악을 하는 동네 어른들과 줄곧 같이 다녔다. 농악을 같이했던 사람들 중에 가장 어린 나이였다.

“재미가 있어서 했지, 없었으면 못했다. 힘든 줄도 몰랐다. 그 당시 생활이 너무 어려워서 희망이 없었는데 농악이 유일한 재미이자 희망이었지 뭐 껄껄껄...”

15세 때 쯤, 삼천포 농악(그 당시에는 진주농악, 삼천포 농악으로 불리었다)에서 활동했던 박 선생님은 부산일보 주최 농악경연대회에서 참가해 3등을 했다. 이 대회에서 초청공연을 펼친 산청 생비량 출신의 명인 ‘송철수’ 선생님을 만나면서 농악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지금으로 따지면 삼천포 농악팀의 실력은 아마추어였고 송철수 선생님의 실력은 프로였다.
송 선생님은 말 그대로 농악으로만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프로선수였던 것이다. 당연히 프로 선수의 실력을 처음 접했던 박 선생님은 입이 딱 벌어졌다. 그래서 송 선생님을 직접 찾아가 “기술을 배우고 싶다”고 대담하게 말했다고 한다.

우연찮게 시작된 두 선생의 만남은 10년간 이어졌다. 흔히 남사당패라고 불리는 송 선생님의 단체에 들어가 처음에는 잔심부름을 하다가 2, 3년 후에 비로소 농악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왔다. 그렇게 경남을 주 무대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기술을 익혔고 송 선생님의 버금하는 실력을 갖추게 됐다.

199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해 공연을 펼치는 모습. 이 대회에서 은메달을 수상했다.

 

“서울에 민속촌이 처음 생겼을 때야. 거기에서만 전속으로 활동하는 남사당패가 있었는데, 오지 않겠냐는 제의가 왔더라고. 요즘 같으면 스카우트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기술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거든. 송철수 선생님도 거기에 계셨는데, 그래서 1년 정도 활동했지”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 박 선생님은 예전처럼 활발하게 활동하지 못했다. 먹고 사는 것이 급하다보니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80년대 초중반쯤인가. 사천 용남고등학교 학생들이 선생님을 찾아와 농악을 배우고 싶다고 청을 해 그 때부터 후학 양성에만 몰두했다. 그 당시 농악을 배웠던 5명의 학생들은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서 지금도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생님을 거쳐 간 제자만 80명이 넘는다고 했다.

후학 양성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자매결연을 맺은 남양초, 중학교에서 학생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다.

한 평생 농악 하나에만 인생을 받쳐온 명인에게도 정말 아쉬움점이 있었다고 했다.
1966년도에 진주 삼천포 12차농악이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삼천포에는 문백윤 선생님이, 진주에는 황일백 선생님이 초대 기능보유자가 됐는데 아쉽게도 명칭이 “경남 12차농악”으로 정해졌다고 했다.

1986년도에 다시 ‘진주농악’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삼천포쪽에서 이건 아니다 얘기가 나오면서 90년대에 현재의 명칭인 진주 삼천포 12차 농악으로 됐다는 것이다.

“전통을 이어가는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으면 해” 진주 삼천포 12차농악의 전통이 계승 발전할 수 있기를 바란다며 박 선생님은 마지막 희망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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