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 "붓다를 죽인 부처" 책 리뷰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왔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할까?
 올해도 어김없이 이 땅의 곳곳에 부처님을 맞이하는 찬란한 플라스틱 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시주를 한다. 그런데 나 아닌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안위를 위해 등불을 밝히는 이는 과연 얼마일까?

 수능과 대학입시철이 되면 대한민국 유서 깊은 절 산문 앞에는 대학입시를 위한 백일기도 플래카드들이 즐비하고 스님들은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하면서 사이사이 기도를 부탁한 시주들의 이름을 부르며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다.

  어제 오늘 뉴스에는 스님들이 도박판을 벌렸다고 떠들썩하다. 출 세간의 그들이 속세에 있는 우리들보다 더 지독한 욕망의 굴레를 가지고 있음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종교, 마루 종(宗)자는 무엇을 말함인가? 가장 크고 높은 가르침을 말한다. 그 간판을 걸고 이루어지는 이러한 일들이 벽안의 한국인의 눈에는 어떻게 비쳐졌을까? 그의 이야기는 솔직하지만 아프고, 부드럽지만 강하다.

  지계(持戒)와 권력(權力)

출 세간의 요체는 지계(持戒)에 있다. 지계의 핵심은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는 것이다. 수행자가 된 사람들이 마땅히 가져야 될 이러한 자세가 부처 사후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 오늘에 이르러서는 계율 자체가 왜곡되어 잘못된 것의 시작과 끝을 알 수가 없다.

▲ '붓다를 죽인 부처'-박노자, 인물과사상사
  이 책에서 '붓다'는 원시불교 당시의 엄격한 계율과 분명한 정신을 나타낸다면 '부처'는 그 사이 우상화되고 권력과 융합되어 본래의 청정함을 잃고 계율은 희미한 그림자로만 남아있는 상태를 이야기 한다. 그 부처가 그 붓다를 죽인다는 것은 본래 불교의 본 모습을 죽이는 것이요 동시에 본래 불교의 왜곡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부처로 부르는 존재는 지극한 경지에 오른 '인간'이기에 우리는 그의 생각이 담긴 말을 통해 그 지극함에 도달하려한다. 하지만 그 말이 세월을 거치면서 다른 것과 융합하여 필요 없이 두터워지고 혹은 왜곡되어 본래 그 사람의 음성은 사라지고 말았다.

  종교는 욕망의 실현도구가 아님에도 '기도'라는 이름으로 변질된 욕망을 추구한다. 기도, 즉 나만을 위한 기도, 혹은 나의 성공을 위한 기도는 타인의 실패를 기대함이요, 타인의 성공을 방해함이니 이는 불교의 근본인 나눔과 자비에 정면으로 맞서는 일임에도 중생구제를 원력으로 세운 수행자들이 그들의 방식으로 이러한 특정인의 욕망의 잔치를 부추기고 심지어 그 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이것의 바탕에는 이 땅의 불교가 가진 근원적 문제, 즉 삼국시대 불교를 받아들인 방식과 원인에 맞닿아 있다. 왕권강화에 필요한 이념적 수단으로서 받아들인 것이 불교였으므로 깨달음이나 보시, 자비는 차후의 문제이었고, 우선의 문제는 권력자들이 어떻게 하면 아무런 반항이나 적대감 없이 민중을 지배할 수 있을 것인가에 그 중점이 있었다. 심지어 가장 엄격한 계율인 불살생마저도 유택(有擇)이라는 단서를 달아 가능하게 한 것을 보면 그러한 속셈이 너무도 확연하다.

  부가적으로 권력자들, 특히 왕들은 고승대덕이라는 이름을 붙인 몇몇의 어용 수행자들을 통해 거대한 불사를 일으키고 그것으로 그들은 인도의 아소카왕이 그랬던 것처럼 전륜성왕의 영예를 누리고 싶어 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전통은 후대로 이어졌고 그것이 고려, 조선에 와서는 승(僧)과 병(兵)이 합해진 승병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청정한 수행자들이 갑자기 호국의 간성이 되고 그 선봉에 선 조선의 '사명'이나 '서산'이 엄청난 선승으로 칭송되고 그것이 오늘날에도 불교와 국가의 관계를 설정하는 최선의 모범사례로 이용되고 있다. 안타깝지만 위대한 호국불교의 전통은 이렇게 형성되었다. 저자는 이 모든 것이 반 계율적이며 반 불교적인 것이라고 지적한다.

  불교와 시대성

  여전히 음력 4월 보름과 10월 보름이 되면 우리나라 절에서는 결제를 하고 하안거와 동안거를 시작한다. 그 기간 동안 '이 뭣고'의 화두를 참선 수행을 한다. 소위 간화선이다. 고려시대 보우로 하여 시작된 우리나라의 전통적 수행방법인 간화선은 사실 송나라 사대부들의 지적인 유희 놀음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하다고 저자는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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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처 생존 시대에 과연 이러한 방법(간화선)으로 깨달음을 얻었겠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현재의 불교 종단의 누구도 분명히 대답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 과연 이 방법으로 우리가 얻고자 함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아마 누구도 쉽게 답을 내놓지 못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간화선'이라는 방법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철학적 유희이거나 거의 어렵겠지만 종교적 위엄 정도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어 보인다. 바꿔 말하면 유효기간이 넘었거나 혹은 잘못된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가 불교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정신적 만족이 아님은 분명히 알고 있다. 수행자가 수행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그 정신적 수행의 결과가 외부로 뿜어져 나와 대다수 민중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질 수 있고, 또 시대를 관통할만한 정신적 의제를 제공하는데 있다고 본다면 지금의 수행과 수행방식은 분명히 많은 문제를 안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부처 생존 당시의 불교는 그 시대상황과 견주어 볼 때 거의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평등과 자유에 기초한 민주적 사고와 행동은 당시 민중들에게 엄청난 공감을 불러 일으켰고 그것이 불교를 세계종교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민주적 정신과 행동은 세월에 의해 가려지고 권력과 융합되어버렸거나 사변철학의 도구로 전락하여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화려해진 오늘날의 모습만 남게 된 것이다.

  세간의 건물들처럼 날로 화려해지는 절집들과 세간 사람들보다 더 속물적인 수행자라는 이름을 단 사람들이 본래 불교의 민주성과 평등성, 그리고 정신적 가치를 훼손하고 그 훼손의 도를 넘어 이제는 역으로 그것을 방어하려는 모습조차 보이는 오늘날의 한국불교에 대한 벽안의 한국인이 하는 충고에 우리는 귀 기울여야 한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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