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은 언감생심’.. 24년째 폐지 줍는 어머니를 만나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했던가. 주말을 낀 ‘어린이날’을 넘어서자 곧 ‘어버이날’을 맞았다. 때 맞춰 경로잔치를 한다, 효도관광을 떠난다, 크고 작은 마을마다 요란스럽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얼굴은 얼마나 편안할까? 늘 자식 걱정이 앞서는 그들이기에 청년실업이 늘고,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증가하는 현실 앞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을 터다.
더욱이, 깊어지는 사회 고령화 추세 속에 오늘도 몸을 움직여야만 땟거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노인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김 씨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사천네트워크’의 이주향 팀장이 함께했기에 인터뷰가 쉬웠다. ‘사천네트워크’는 도움을 주려는 이와 도움이 필요한 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지역 단체다.
“남들은 경로잔치나 효도관광 간다고 야단인데, 어디 놀러 안 가세요?”
‘누구 염장 지르나?’ 이런 답변이 돌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조금 의외였다.
“내 복에 효도관광은 무슨..(침묵) 그래도 내가 하는 기 아무 것도 아인 것 같지만 이것도 약속인기라. 치워야 할 게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안 오모 더 답답해 해. 우짜다 맘이라도 틀어지면 내는 일거리를 놓치삐는 기지.”
자신의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일감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 씨의 불안감은 오랜 경험의 산물일 테다. 그녀가 대표적인 경험 한 가지를 털어놨다.
그 때 충분히 요양하지 못해 지금도 무릎이 아프고 다리를 조금 절기까지 한다는 김 씨다. 그녀가 폐지 모으는 일을 시작한 것은 24년 전. 주로 사천시 벌리동과 용강동 일대를 도는 김 씨는 이 지역 변천사를 훤히 기억한다.
처음엔 폐지 모으는 사람이 드물어 활동무대가 넓었고, 그만큼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경기가 나빠지고, 허드렛일이라도 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줄어 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김 씨의 활동 반경과 수입은 자연스레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트럭을 가진 전문 수집상이 골목까지 누비는 데다, 좀 크다 싶은 기관이나 단체는 특정 업체에 일을 맡겨, 김 씨처럼 홀로 폐지를 줍는 이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폐지 재활용품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폐지값은 더욱 하락세다. 신문종이는 1kg에 100원, 종이상자는 70원 선이란다. 다행히 요즘은 플라스틱류도 돈으로 바꿔주는 추세라 수입을 만회해준다.
김 씨에게 하루 일과를 물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먼저 우유가게부터 찾아가지. 그 시간에 폐지가 많이 나오거든. 다음엔 아파트 등을 돌고. 아파트는 자체 관리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7시쯤 집에 돌아와 주워온 것 정리해 놓고 아침 먹으면 9시 남짓 되나? 그럼 오전에 한 번 더 돌고. 늦은 점심 먹고 오후에 또 한 번 나갔다 오면 저녁 되지. 하루가 금방 가.”
새벽5시부터 저녁7~8시까지, 쉬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12시간 가까이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30만 원 안팎. 그럼에도 이 돈으로 저축하며 산다니 감탄할 따름이다.
물론 몸이 불편하나마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 씨 특유의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분명 불가능했을 일이다.
“내가 아무리 고물을 줍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해야 되것다.”
감탄하며 집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김 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리어카(수레)를 끌고 지나가다 보면 아주 점잖게 차려 입은 노인분이 ‘고생하십니더’ ‘욕 봅니더’ 하고 인사를 하곤 하는데, ‘아이구 내 같은 게 뭐라꼬 저리 인사를 하는고’ 싶어 내가 우짤 줄 모르것어. 고마워 죽겠고. 반대로 ‘아이고 이뻐라’ 하고 용돈이라도 줄까 싶어 아이한테 다가가모, ‘이 할매가 더런 손으로 지금 머 하는 기고?’하며 기겁을 하는 새댁도 있다 아이가. 참 씁쓸하고 기가 맥힌다.”
그렇게 말하는 김 씨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내 소원이 돈 벌어서 아들 장가보내는 거였는데, 우짜다 보니 고마 때를 놓쳤다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들 소식을 얼핏얼핏 꺼낸 김 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그녀의 아들 자랑이 느껴졌다.
그러나 김 씨의 유일한 ‘고민거리’ 역시 그녀의 아들로 보였다. ‘자식을 제 때 혼인시켜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대한민국 부모는 몇 없을 테니까.
‘대한민국의 어머니, 아버지시여. 부디 이날 하루만이라도 어여쁜 꽃 한 송이 품으시라. 아들, 딸, 손주 걱정 내려놓으시고, 다 잘 될 거라는 믿음 가지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