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은 언감생심’.. 24년째 폐지 줍는 어머니를 만나다

5월을 가정의 달이라 했던가. 주말을 낀 ‘어린이날’을 넘어서자 곧 ‘어버이날’을 맞았다. 때 맞춰 경로잔치를 한다, 효도관광을 떠난다, 크고 작은 마을마다 요란스럽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 얼굴은 얼마나 편안할까? 늘 자식 걱정이 앞서는 그들이기에 청년실업이 늘고,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가 증가하는 현실 앞에 마음이 편치 만은 않을 터다.

더욱이, 깊어지는 사회 고령화 추세 속에 오늘도 몸을 움직여야만 땟거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노인들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있을까.

▲ 24년째 폐지를 모으며 살아가는 김선녀(67, 가명) 씨를 어버이날인 8일 만났다. 그녀는 경로잔치나 효도관광 대신 이날도 열심히 자신의 구역을 관리(?)하고 있었다.
평소 폐지와 빈병 등을 모아 고물상에 파는 일을 하는 김선녀(67, 가명) 씨는 8일, 어버이날임에도 학교매점과 상가 등을 누볐다. ‘오늘은 어디서 횡재(?)가 기다리고 있을까’ 이런 기대를 품으면서다.

김 씨가 잠시 쉬는 틈을 타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는 ‘사천네트워크’의 이주향 팀장이 함께했기에 인터뷰가 쉬웠다. ‘사천네트워크’는 도움을 주려는 이와 도움이 필요한 이를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지역 단체다.

“남들은 경로잔치나 효도관광 간다고 야단인데, 어디 놀러 안 가세요?”

‘누구 염장 지르나?’ 이런 답변이 돌아오면 어떡하나 걱정하면서도 조심스레 운을 뗐다. 그런데 돌아온 답은 조금 의외였다.

“내 복에 효도관광은 무슨..(침묵) 그래도 내가 하는 기 아무 것도 아인 것 같지만 이것도 약속인기라. 치워야 할 게 있는 사람들은 내가 안 오모 더 답답해 해. 우짜다 맘이라도 틀어지면 내는 일거리를 놓치삐는 기지.”

자신의 일이 ‘꼭 필요한 일’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일감을 놓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느껴지는 대목이다. 김 씨의 불안감은 오랜 경험의 산물일 테다. 그녀가 대표적인 경험 한 가지를 털어놨다.

▲ 김 씨의 몸집은 웬만한 초등학생보다 작았다. 사천네트워크 이주향 팀장이 인터뷰를 도왔다.
“한 3년 전에 무릎이 아파 수술을 했지. 병원에선 1년 정도 무리하지 말고 쉬라 카는데, 내가 그랄 수 있나. 석 달 쉬고 다시 일을 시작했지. 그런데 전에 내가 맡았던 곳을 다른 사람들이 다 차지해삔 기라. 생각해 보모 우짤 수 없는 일이지. 주인 입장에선...”

그 때 충분히 요양하지 못해 지금도 무릎이 아프고 다리를 조금 절기까지 한다는 김 씨다. 그녀가 폐지 모으는 일을 시작한 것은 24년 전. 주로 사천시 벌리동과 용강동 일대를 도는 김 씨는 이 지역 변천사를 훤히 기억한다.

처음엔 폐지 모으는 사람이 드물어 활동무대가 넓었고, 그만큼 재미도 있었다. 그러다 경기가 나빠지고, 허드렛일이라도 할 수 있는 자리가 점점 줄어 더 많은 사람이 이 일에 뛰어들었다. 김 씨의 활동 반경과 수입은 자연스레 크게 줄었다.

최근에는 트럭을 가진 전문 수집상이 골목까지 누비는 데다, 좀 크다 싶은 기관이나 단체는 특정 업체에 일을 맡겨, 김 씨처럼 홀로 폐지를 줍는 이들은 더욱 힘들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폐지 재활용품의 소비가 줄어들면서 폐지값은 더욱 하락세다. 신문종이는 1kg에 100원, 종이상자는 70원 선이란다. 다행히 요즘은 플라스틱류도 돈으로 바꿔주는 추세라 수입을 만회해준다.

▲ 김 씨는 3년 전 무릎수술을 해야 했다. 이로 인해 그 전까지 닦아 놓았던 폐지수거구역을 모두 잃었다. 이 일도 그만큼 신뢰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만큼 몸은 더 피곤하다. 어느 가게라도 들어갈라치면 폐지는 폐지대로, 플라스틱은 플라스틱대로 가려내고, 그 나머지도 깔끔히 정리를 해줘야 한다. 그래야 일종의 ‘고객관리’가 되는 셈이다.

김 씨에게 하루 일과를 물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먼저 우유가게부터 찾아가지. 그 시간에 폐지가 많이 나오거든. 다음엔 아파트 등을 돌고. 아파트는 자체 관리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해서.. 7시쯤 집에 돌아와 주워온 것 정리해 놓고 아침 먹으면 9시 남짓 되나? 그럼 오전에 한 번 더 돌고. 늦은 점심 먹고 오후에 또 한 번 나갔다 오면 저녁 되지. 하루가 금방 가.”

새벽5시부터 저녁7~8시까지, 쉬는 시간을 감안하더라도 12시간 가까이 일을 하는 셈이다. 그렇게 버는 돈은 한 달에 30만 원 안팎. 그럼에도 이 돈으로 저축하며 산다니 감탄할 따름이다.

물론 몸이 불편하나마 남편이 있고, 아들이 있기에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김 씨 특유의 부지런함이 없었다면 분명 불가능했을 일이다.

▲ 김 씨의 집 마당에는 각종 고물이 수북하다. 하지만 정리정돈은 '칼' 같다.
벌리동에 있는 김 씨의 집 마당에서 그녀의 부지런함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었다. 고철류와 플라스틱류가 큰 비닐봉지에 담긴 채 어른 키 높이로 쌓였고, 빈병 무더기는 현관 앞을 독차지했다.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종이류는 비에 젖지 않도록 덮개에 씌워진 채 큰 고물상에서 수거해 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이 온통 고물로 가득했지만 정리정돈은 그야말로 ‘칼’ 같았다.

“내가 아무리 고물을 줍고 있지만 이 이야기는 해야 되것다.”

감탄하며 집을 둘러보는 기자에게 김 씨가 불쑥 말을 꺼냈다. 그것은 자신의 직업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에 관한 것이었다.

“리어카(수레)를 끌고 지나가다 보면 아주 점잖게 차려 입은 노인분이 ‘고생하십니더’ ‘욕 봅니더’ 하고 인사를 하곤 하는데, ‘아이구 내 같은 게 뭐라꼬 저리 인사를 하는고’ 싶어 내가 우짤 줄 모르것어. 고마워 죽겠고. 반대로 ‘아이고 이뻐라’ 하고 용돈이라도 줄까 싶어 아이한테 다가가모, ‘이 할매가 더런 손으로 지금 머 하는 기고?’하며 기겁을 하는 새댁도 있다 아이가. 참 씁쓸하고 기가 맥힌다.”

그렇게 말하는 김 씨의 눈가가 이내 촉촉해졌다.

▲ 김 씨의 집 전경.
김 씨는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고 있지만 아직 장가를 보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어린 아이들을 보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다고. 그러나 손사래 치기에 급급한 애 엄마들을 만날 때면 설움이 북받친다.

“내 소원이 돈 벌어서 아들 장가보내는 거였는데, 우짜다 보니 고마 때를 놓쳤다 아이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아들 소식을 얼핏얼핏 꺼낸 김 씨.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다는 그녀의 아들 자랑이 느껴졌다.

그러나 김 씨의 유일한 ‘고민거리’ 역시 그녀의 아들로 보였다. ‘자식을 제 때 혼인시켜야 한다’는 부담에서 자유로울 대한민국 부모는 몇 없을 테니까.

‘대한민국의 어머니, 아버지시여. 부디 이날 하루만이라도 어여쁜 꽃 한 송이 품으시라. 아들, 딸, 손주 걱정 내려놓으시고, 다 잘 될 거라는 믿음 가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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