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에 떠난 번개 산행,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개운합니다.

걸음을 내딛기 힘들 정도로 불어 대는 바람과 모래라도 씹은 듯 기분을 지저분하게 만드는 비. 오는 것도 마는 것도 아닌 비와 짜증스러운 돌풍으로 금요일 아침을 맞았다.

아파트 계단에 서서 바다 건너 느태공단의 짙은 회색 하늘 위로 빨갛고 노란 조명이 생경해 보인다.

 

어제.

새벽 다섯시, 언제부턴가 일상생활처럼 돼 버린 깜박 잠. 불면증까지는 아니더라도 깊이 잠들지 못하는 날이 늘어 간다. 간밤 무렵 느닷없이 지리산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까 말까 망설이다 새벽 한 시경이 되도록 잠을 설쳤다. 이러다가 산은커녕 일어나기도 힘들겠다!

산에 갈 요량으로 다섯시 반으로 맞춰 놓은 시계 알람을 끄고 잠을 청했다.

 

두 번을 깼다.

 

새벽 다섯시,  눈이 떠져 버렸다.  방법이 없다.

가자!

 

주섬주섬 배낭을 챙겼다. 딸랑 버너와 코펠 하나가 가진 모든 것이기에 짐 꾸리기는 금새 끝났다. 느닷없는 남편의 산행에 아내는 말을 잃었다.

현관 문을 열고 나설 때까지 야속함과 못 마땅한 기운이 끈끈히 전해져 온다.

지하주차장, 시동을 걸었다. 연료가 한 칸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중산리까지 견뎌 보자…’

대진고속도로를 타고 단성에서 20번 국도로 갈아 탔다. 연료가 바닥을 가리키고 있다.

조금 더 조금 더

결국 중산리 주차장을 10여 킬로미터 앞두고 주유소를 찾았다.

 

중산리 주차장은 평일이라 그런지 거의 텅 비어 있었다. 근처 식당에서 시락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아침 여덟 시 십분, 산행이 시작됐다.

지리산은 87년도 고3때, 졸업한 선배들을 따라 삼일절 연휴 1 2일로 따라 나선 게 처음이었다. 무릎까지 빠지는 눈, 난생처음 등산이라 장비도 없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로타리 산장에서 밤새 떨다 날이 샜다. 그 뒤로 이런 저런 모임을 통해 본의 아니게 두번을 더 다녀 왔다중산리로 세 번을 다녀 온 지리산행은 지독했고 다시는 반복하고 싶지 않은 노동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왜 그랬을까, 회사 친구의 말마따나 죽을 때가 됐을까? 내 발로 지리산을 찾다니……

매표소를 지나 이십 여분을 걷다 보니 구름다리가 나왔다.

이십년전에도 이 다리는 있었던 것 같은데...... 

 평일이라 산은 텅 비어 있었다.

입구에서 한 시간 가까이 산을 올라섰을 즈음 사람이 보였다.

 온 몸이 땀범벅이다. 몸이 젖는 것보다 안경에 떨어진 땀방울이 영 성가시다. 뭔가 또 질러야 할 필요

성을 느끼는 순간......안 돼, 참자.......

 

응달진 곳에는 녹지 않은 얼음이 남아 있었다. 신기한 마음에 사진을 찍었지만  이 곳으로 부터 채 삼십분도 지나지 않아 눈밭을 만나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로타리 산장을 지척에 두고 시야가 탁 트인 곳에 도착했다. 쬐그마한 배낭 하나 딸랑 매고 온 나와 달리 가끔 완전군장을 꾸린 프로(?)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경치, 당연히 좋다. 이런 풍경 자주 볼 수 있는 것 아니다.

하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왜 그랬을까?

지리산을 감동없이 바라 봤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아무튼 어제의 산행은 뭔가 느끼고 싶어서도, 특별한 의미가 있어  간 것은 아니었다.

그냥 가고 싶었을 뿐.

놀러 간 것,

놀러 간 것이었다.

 어라, 무슨 절인 줄 알았는데 여기가 로타리산장이군!

한 무리의 사람이 모여 있었다. 번잡한 게 싫어 그대로 지나쳤다.

누군가 "서울에서 온 젊은이들 참 대단하네, 대학 졸업하고 바로 산에 온기가?"라며 호기롭게 질문했고 "아뇨 졸업한 지는 꽤 됐죠" 라는 상대편의 대답이 귓전으로 지나갔다.

살다보면 대화가 성가시게 느껴질 때가 있다.

산을 오르는 내내 가파른 길이 잘 정비돼 있다.

누군가는 좋아 할테고 누군가는 싫어 할테지.

개선문에 도착했다. 날씨가 포근해 외투를 벗어 배낭에 넣었더니 한결 편했고 이맘때쯤

가쁜 호흡도 잦아 들었다.

지나 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가파르다.

다리는 풀려 한 걸음을 내 딛기 힘든 상태였다. '하지만 저 위가 정상이겠지'.

 천왕봉이다.

아침 여덟시 가 좀 지나 출발해 열시 오십분에 도착했다.

정상에는 바람이 심했다. 서둘러 외투를 꺼내 입고 서쪽방향의 장터목 산장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눈은 거의 녹았을 겁니다", "눈 안 온 지 꽤 돼서 괜찮을 걸요"

매표소 직원과 동네 등산용품점에서 만난 어는 고수의 말이 무색해 지는 순간이다.

'뻥쟁이들가트니......'

 

 응달진 곳에 쌓인 눈은 삼월이 지나도록 녹지 않을 터.

탁 트인 시야와 완만하게 경사진 개활지가 나왔고 의례껏 지리산 하면 연상되는 고사목이 듬성 듬성 서 있었다.

 

시든 잡초들이 지천이다. 바람이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청대다 서리와 눈, 비에 젖어 피곤한 몸을 내팽개 치듯아무렇게나 쓰러져 있다.

 장터목 산장까지 가는 길목은 온통 눈밭이었다. 곳곳이 빙판으로 변해 있었고 아이젠이 없었기에

기다시피 산을 내려 갔다. 철계단을 앞 두고 엉덩방아를 찧었고 그대로 미끄러져 계단 입구까지

밀려 갔다. 마주 쳐 올라 오던 젊은이들이 근심섞인 격려를 해 줬다.

 

저 앞에 장터목 산장이 보인다. '다 왔다!'

순간 방심했을까 몸이 붕 뜨더니 그대로 뒤로 나자빠져 버렸다.

'철퍼덕~~~'

배낭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마음이 쓰렸다.

산장의 운치를 둘러 볼 마음이 없었기에 곧장 실내 취사장에서 때꺼리를 꺼냈다.

이럴수가......

아까 넘어 지던 충격으로 배낭 속 코펠이 아작이 나 있었다.

'산 지 일주일 밖에 안 됐는데......'

대충 손으로 펴 불을 지폈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집에서 퍼 간 식은 밥을 말아 먹고 커피 한잔을 끓여 마셨다.

 정오가 막 지났다.

'가자'

지리산의 서쪽으로 응달진 계곡에는 녹지 않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스틱과 간간히 처져 있는 로프를 의지하며 산을 내려 갔다.

 

곰이 출몰한단다. '무섭다!'

 더 이상 눈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내려 왔을 무렵 폭포가 나왔다.

두 사람이 고드름을 입에 물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우워어어어어~~~" "얏호~~!!!" 난리다.

야인시대를 보는것 같다.

멋적은 생각에 멀리서 사진 한장 딸랑 찍고 길을 재촉했다.

 

 타이머를 돌려 놓고 셀카를 시도하다 실패했다. 지우려다 다시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어 그냥 뒀다.

"마치 걷고 있는 것 같지?"

 계곡 물을 따라 걷다가  적당한 곳에 이르러 발을 담궜다. 차다!

5초를 견디기 힘들다.

발을 말리고 하루 종일 땀에 젖은 양말을 갈아 신었다.

기온이 십 사도까지 오른다고 했던가?

셔츠 한장 입고 드러 누웠는데 포근하기 그지없다.

 잠깐의 휴식으로 재충전됐다. 본격적으로 내리막을 만나 아프던 무릎도 휴식 후 상태가 나아졌다.

산에서의 해는 짧다고 했던가.

어느새 해가 산능성이로 기울어 가고 있었다.

 매표소에 도착하니 오후 2시 10분.

산행이 끝났다.

 

중산리로 올라 간 네 번의 지리산 행.

자발적으로는 처음.

동네 마실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훌쩍 다녀 왔다.

 

하루 밤을 자고 났더니 목덜미가 뭉쳐 있다.다리나 무릎, 사지는 멀쩡한 데 목이 아프다.

산을 타면서 꽤 용을 썼나 보다.

 

집 뒤 산에나 오르려고 시작한 산행..... 이러다 어디까지 가게 될까?

 

지난 해 연말 오토바이가 떠난 마음 자리에 산이 들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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