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선생의 오솔길>1. Jean Sibelius Violin Concerto D Minor Op.47 리뷰

1. Allegro, Moderato.

40대 후반에 듣는 시벨리우스는 20대 후반에 들은 시벨리우스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여 어렵게 CD를 찾아 오디오에 넣고 소파에 깊숙이 앉아 리모컨 PLAY 단추를 누른다.

삶의 여러 장면들 속에 이 음악의 장면들은 지난 20대 후반, 내가 만났던 사람들로 연결된다. 그 알 수 없던 갈증의 20대 후반에 만난 그들에 대한 기억은 나에겐 이제 안개처럼 흐리고 불분명하게 남아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그 당시 이 음악에 대한 주제는 ‘북해’ 정확하게는 북 대서양 아니 북극해 가까이 있는 유빙과 안개가 뒤덮은 바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 바다를 가 본적은 없지만 이 음악이 그 바다로 우리를 안내했고 그 시절 우리는 그것이 적합한 느낌일거라고 거의 확신했다.  

가늘고 예리한 바이올린 독주. 현을 켜는 동작이 눈에 보일듯한 현란한 바이올린의 독주 뒤로 쓸쓸한 관악(관악기가 참 쓸쓸하게 들리는 경험을 하게 된다)이 흐르고 폭발적인 합주와 이따금씩 타악의 변주는 작곡자 본인의 삶이 투영된 듯 매우 넓은 음계를 오르내리며 쉽게 가늠할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이야기한다.  

음악이 편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진 사람들은 시벨리우스의 음악을 들으면 자칫 분열증에 빠질지도 모를 만큼 음의 고저와 장단이 심하다. 음색조차도 거칠고 예리함이 급작스럽게 교차하고 있어 음악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다면 아마 약간의 거부감을 느낄지도 모를 일이다. 

2. Adagio Di Molto.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라그나뢰크 이후인 것처럼 느리게 느리게 내려앉는 바이올린 독주 뒤로 이따금씩 이어지는 유니즌의 웅장함이 ‘거대한 고요’ 혹은 ‘거대한 침묵’을 느끼게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의 나의 세계관은 이성적, 합목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스스로 매우 이성적이며 합목적적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행동에 당위성을 부여했을 것이다. 무엇하나 뚜렷한 개념의 정립도 없었으면서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강조했고 그 강조가 먹혀들지 않으면 곧 부정하거나 혹은 꺾으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침묵이 훨씬 유용한 도구이었음에도. 

불현듯 1악장의 주제가 목관악기로 연주되고 이어서 날카로운 현의 음정이 정점으로 거의 도달할 듯 오르다가 다시 슬픔과 우울함으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삶이 이렇듯 가라앉게 되어도 언제나 그렇듯이 새로운 희망은 생겨나는 법이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그러나 끊어지지 않게 바이올린이 멈춘다. 

3. Allegro, Ma Non Tanto. 

시벨리우스인들 열정이 없었을까? 3악장은 그의 유럽유학을 반영한 것처럼 보인다. 춤곡처럼 경쾌한 곡의 시작과는 달리 갑자기 불안해지더니 그 불안이 고조된다. 고조된 불안으로 올라가던 바이올린은 심포니의 유니즌을 만나 환희로 급변한다. 

음악을 들을 수 있던 도구가 부족했던 그 시절 휴대용 재생기에 테이프레코드를 꽂아서 이 음악 저 음악을 열심히 들었었다. 작은 소리나 깊은 소리는 잘려 나간 중역의 음색만이 있는 엉성한 스테레오에도 우리의 귀는 황홀해했다. 그렇게 들은 음악들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기억으로 내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음악이란 '느낌'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환희가 지속되는 것은 오히려 삶을 불안하게 한다. 그것을 아는 듯 목관의 고요함으로 분위기를 정리하고 있다. 여러 악기를 통한 주제의 반복은 곡의 두께를 더하는 일이다. 두툼한 느낌은 비단 책으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제 마지막을 암시하듯 모든 악기들이 일제히 폭발적으로 주제를 연주한다. 하지만 지나치지 않게 마무리 된다. 

<김 선생의 오솔길>은 현현적적 시민기자가 클래식 평론, 영화 평론, 책 평론 등으로 세상읽기를 하는 공간입니다. 현현적적은 곤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김준식 교사의 필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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