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없는 겨울 산행길..한 폭의 산수화를 만나다

거의 매일 기상청 산악일기예보를 확인하면서 이제나 저제나 지리산에 눈이 오기만을 기다리고있던 중 지난 1월 중순에 반가운 눈 소식이 있어서 휴가를 내고 중산리로 향했지만 대설주위보라 출입을 통제 한단다. 이제 막 햇볕이 들기 시작하는데 무슨 통제냐고 항의해도 별수 없어 중산리 등산로 입구의  가게 안에서 이제자 저제나 길이 열릴까 두시간을 기다렸다. 오전 9시 30분쯤 관리사무소 직원분이 가게로 전화를 하셨다. 눈은 그쳤지만 주능선에는 바람이 너무 거세게 불어 러셀작업이 불가능하니 오늘은 아무래도 산에 오르기 힘들것 같다는 것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자 마자 지리산관리공단 홈피를 열어 확인해 보니 이런 ! 어제 9시 정각에 지리산 전면 입산통제가 해제되었다는 것이다. 그시간이면 분명 가게에서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화를 걸어 젊잖게 항의하니 처음에 발뺌을 하다가 결국은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신다.

 

지난 1월 30일 오랫만에 지리산 눈소식이 있어 친구와 함께 날을 잡는데 하필이면 2월 2일, 올겨울 들어 제일 춥다는 날씨다. 그래도 좋다 어쩌면 올겨을 마지막 지리산행일지도 모르는데 추우면 어떠냐하고 마음 먹었는데 같은 직장의 여직원 두분이 갑자기 함께 가면 좋겠단다. 약간의 걱정이되어 산행코스를 변경하여 거림에서 세석으로 올라가자고 둘이서 미리 결정했는데 여직원 두분이 끝까지 천왕봉으로 가자고 우긴다 . 결국 천왕봉으로 오르기로 하고 2월 2일 아침 8시 진주에서 만나 넷이서 지리산으로 향했다.

 

 

중산리 입구에서 바라다 본 천왕봉

 

 

칼바위 삼거리에서 잠시 쉬면서 아이젠을 신고 스틱을 꺼내 본격적인 산행에 나선다. 거저께 눈이 왔기 때문에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바닥에만 눈이 쌓여있고 나무가지에는 눈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저멀리 허연 눈을 머리에 이고서 나를 내려다 보고 있는 천왕봉을 향해 거친 숨을 토하며 오르고 오른다.  로타리 산장 입구 평지에서는 천왕봉과 법계사가 훤히 보인다.  날씨가 너무 추워 사진을 찍기 위해 장갑을 벗고 스위치를 누르는 것 자체가 고역이다. 더군다나 카메라를 켜자 마자 밧데리 잔량부족 표시가 깜박거린다. 밧데리도 꽁꽁 얼었나 보다. 카메라를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인양 속옷 깊숙히 넣고 지퍼를 꽁꽁 잠가 체온으로 밧데리를 데워 볼려는데 효과는 영 별로다. 

 

법계사, 천왕봉 

 

로타리 산장에서 잠시 쉬는데 다른 분이 여기 산장의 실내 온도가 영하 23도라고 알려 주신다. 다행이 바람이 많이 불지 않아 체감온도는 그다지 낮은 것 같지는 않다. 로타리 산장을 출발해서 눈쌓인 법계사를 잠시 들리자고 했더니 함께 간 친구가 그냥 가잔다. 아무래도 여직원 두분이 신경이 쓰이는가 보다. 혹시나 하산시간을 놓칠까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법계사를 지나자 멀리 남쪽으로 진양호, 삼천포 와룡산, 삼천포화력발전소, 하동 금오산, 하동화력 등 남해바다가 시야에 들어 온다.  구름 한점 없이 시야가 너무 깨끗하다.

 

근데 점점 속이 불편하고 답답해지면서 다리에 힘이 쭉 빠진다. 산장에서 빈속에 급하게 먹은 쏘세지가 체한 모양이다. 호홉은 가파르지 않은데 다리는 영 마음대로 따라 오지를 않는다. 속도를 늦추어 어슬렁 어슬렁 올라가다 보니 앞서간 두분과  거리가 차이 나기 시작한다. 그래도 법계사 위로는 눈도 더 많이 쌓여 있고 특히 통천문을 지나니 혼자서 속으로 기대하던 지리산 겨울 경치가 나를 반긴다.

 

 

 

법계사에서 천왕봉 오르는 길

 

 

드디어 천왕봉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춥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는데 천왕봉에 올라서는 순간 매서운 칼바람에 몸이 휘청거리고 얼굴은 차갑다는 느낌 보다는 작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것처럼 따끔거린다. 서둘러 다른 산꾼께 4명이 함께 찍을 사진을 부탁하고 불과 몇십초 동안 포즈를 잡는데 그시간이 엄청 길게 느껴진다. 서둘러 천왕봉을 내려 서서 제석봉으로 향하는데 파란 하늘과 나무가지에 달라 붙은 흰 눈이 어울러진 경치에 황홀하기까지 하다.  장갑을 벗은 손가락은 이제 감각이 없어졌지만  "그래! 내가 이 아름다운 경치를 볼려고 이 추운날 여기까지 왔다"는 생각으로 연신 카메라 샤타를 눌렀다. 

 

 

 

 

 

 

 

 

 

 

 

 

 

 

 

 

 

 

 

 

 

장터목 산장에서의 만찬. 겨울 산행에서 뜨거운 라면과 소주한잔은 즐거움을 넘어서는 기쁨 그 자체다. 하지만 너무 날씨가 추워 소주는 그냥 냉수맛만 느껴진다.

 

점심을 먹고 장터목에서 중산리로 향하는데 경사가 가파른데가가 내린 눈이 얼지 않아 아이젠이 제 역활을 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진다. 몇번의 엉덩방아를 찧다가 결국은 오른쪽 다리가 바깥쪽으로 제껴지면서 무릎부위에 순간적으로 격심한 통증을 느꼇다. 조심해서 걷는다는게 미끄러지면서 두번째로 같은 부위에 통증을 느꼈지만 하산하는데는 별다른 지장이 없어 그대로 내려왔다. 유암폭포를 지나고 수많은 산꾼들의 소원이 작은 돌탑으로 새겨져 있는 너덜지대를 지나 다시 칼바위 삼거리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가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

 

 

 

1시간 30분 동안 차를 운전하여 집으로 돌아와서 차에서 내리는 순간 오른쪽 무릎에 통증이 생기면서 걸음을 걷기가 어렵다. 겨우 쩔뚝 거리면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다음날은 더 심해진다. 결국은 한의원에서 침도 맞고 뜸도 뜨고...

 

그래도 이번 산행에서 후회는 없다. 삔 무릎의 고통보다 훨씬 더 많은 기쁨과  만족을 가슴 가득 느끼고 왔기 때문이다.

 

천왕봉에서 제석봉 까지의 눈경치

 

겨울 지리산을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지리산에서 가장 경치가 쫗은 곳이 바로 이 구간인것 같다. 몇년 전 처음으로 나선 지리산 겨울 산행길에서 통천문 위에서 작은 봉오리를 바라다 본 순간 내가 그냥 한폭의 산수화 속으로 걸어 들어온 것 같다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오늘 처럼 추운 날 입술이 얼어붙어 제대로 발음이 나오지 않았던 그날 만났던 천왕봉과 제석봉 까지의 겨울 경치는 정말로 죽을 때 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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