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계선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 "용서와 화해 이뤄지길.."

독자들에게 ‘그 날의 그 일’을 어떻게 하면 쉽고 정확하게 이해시킬까? 하국장이 고민 끝에 불쑥 던진 제의가 ‘단편소설’로서의 정보 전달이었다. 기자인 하국장 입장에서 몇 년을 두고 고민한 ‘발굴기사’고 취재였겠지만 정작 기사게재 방법의 선택은 쉬운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향토사 관련으로 조언하고 자문하는 입장에서 예의상 거절할 수 없어 수락은 했지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다.

말이 쉬워 ‘소설’이지 작가도 아니고 소설은 써 본 경험도 없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픽션’으로 구성하지만 본질을 훼손하지 말아야 하는데 써놓고도 부끄럽다. 시간과 사건전개는 국가기록원의 ‘민의원 조사보고서’를 토대로 했고 소재는 취재 과정의 증언을 토대로 한 소설아닌 소설이며 소설인 이상, 허구이다.

사망자 26명 중상자 31명 경상자 23명, 도합 80명의 희생자를 낸 스티그마 학살사건이 주제다. 이 사건의 가해자로 연행된 84명의 마을 주민도 있지만 다루지는 않았다. 자료 조사 과정에서 이들도 시대적 피해자라는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단편의 한계 상, 다루지 못 했다. 어쨌든 그날의 사건은 1957년 8월28일, 추석을 열하루 앞둔 날 발생했으니까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의 일이다. 

질병 확산을 예방한다는 명목으로 정관수술을 자행한 검시실 뒷편의 단종대. 해방이후 한 동안 공공연히 자행되어 왔다.그러나 오늘에 와서 한센병은 유전되지 않는 질병임이 밝혀졌다.

당시의 교통과 통신 사정상, 사건이 터지고 이틀이 지나서야 신문에 보도되었다. 전대미문의 나환자와 현지주민과의 집단 충돌이라고 대한민국이 떠들썩했다. 이 사건으로 치안책임자이던 삼천포경찰서장과 서포지서장이 파면되고 당시 영복원 원장과 비토리 주민 84명이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됐다. 또 경남 전역에 있는 나환자가 보복을 위해 소요를 일으킨다는 유언비어가 돌고 치안당국은 이를 우려해 경계를 강화하기도 했으며, 국회차원의 진상조사단이 꾸려졌다.

평온한 시골에서 발생한 사건으로는 너무 참혹했고 군이나 집단이 아닌 양민집단 간의 충돌이어서 온 나라의 관심이 집중됐다. 비토섬 작은 초등학교가 수사본부가 되고 밤낮으로 대형 경비정이 오고 갔다. 평상시 같으면 이 자체가 구경거리이겠지만 비토리의 각 가정은 가장과 가족의 일원이 범죄자로 구속되는 슬픈 시간이었다. 

질병으로서의 한센병은 낫는다. 그러나 사회병리로서의 한센병 치료는 아직도 요원하다.오마도간척사업에서 모은 돈으로 세운 구라탑(救癩塔) 탑신 아래에 '한센병은 낫는다'고 쓰여 있다.

그때는 그랬다. 나병이 불치병으로 인식되어 왔고 전염이 되는 병이라 나병치료는 격리가 원칙이던 때를 벗어나던 무렵이다. 병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빈약하던 터라서 마을주민의 공동자위권 행사라 어쩔 수 없는 일이라 보는 시각도 그래서 생겨났다. 그러나 치안력 부재와 직무유기의 국가적 책임을 피해 갈 수 없는 사건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리고 잊혀졌다. 세간도 그날을 기억에서 지우려는 분위기가 지배했다. 엄존한 사건은 54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 사건 당시의 피해자도, 가해자도 세상을 떠나면서 묻혀 갔다. 삶의 형편이 나아지고 의료기술이 병의 근원을 밝히고 완치를 선언 했음에도 차별과 편견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착촌 건립 반대시위, 초등학교 공학 거부등 스티그마로서의 사회적 차별과 격리의 ‘임계선’은 여전히 존재해 왔다. 

조선나예방령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설치된 감금실. 해방후에도 사용되었으며 반인권적 구금시설로 한센인 학대의 상징이다. 마음의 구금은 언제나 풀릴런지 이해와 관심이 필요하다.

1980년대 들어서 ‘나병’은 인권보호 차원에서 한센병으로 고쳐 불렀다. 1943년경 항나제(抗癩劑)DDS의 도입으로 전염성이 거의 사라지고 치료방법도 격리에서 통원으로 전환되면서 50년대 말에는 ‘음성나환자’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우리나라는 1963년 전염병 예방법에서 제 3종 전염병 중 나병환자의 격리에 관한 항목을 삭제한 것으로 법적으로는 강제격리정책을 폐지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보건당국에서 강제로 잡아다 소록도로 보내는 정책은 70년대 말까지 계속했다는 주장이 있다. ‘나치료’가 재활치료 중심으로 바뀌면서 불치의 질병은 완치의 병으로 들어섰다. 1982년 세계보건기구는 한국에서 나병이 완치된 것으로 선언했고 이를 계기로 2000년도에 들어 ‘나병’은 ‘한센병’으로 용어의 변경이 법제화되고 제3군 전염병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화해가 필요했다. 피해와 가해의 구분 보다 무지와 편견의 벽을 깨는 뭔가가 필요했다. 그날의 기억을 어두운 과거로 덮지 않고 밝은 광명에 내 보임으로서 함께 극복하는 인간으로서의 화해선언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 땅에 또다시 같은 비극이 재발하지 않도록 기념하고 기억하는 극복의 노력이 필요하다 본다.

한편으로 성한 자들을 위한 치유의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제대로 알고 지나친 공포에 기인한 엉뚱한 자기 방어로 심약하고 사회적 약자인 이 세상의 또 다른 질병류에 고통 받는 이들을 두 번 죽이는 사회병리를 막고 싶었다.

한센병은 나균에 의해 발병하지만 완치되는 질병이다. 정상인의 95%는 자연 면역력을 가지고 있어 걸리지 않는다. 걸리더라도 조기에 발견하면 외상적 후유장애 없이 깨끗하게 완치된다. 활동성 균 보유자라 하더라도 나균 자체가 전염력이 낮아 리팜피신 600mg 1알이면 99.99%의 전염억제력을 발휘하기에 전염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으며 유전되는 질환은 더더욱 아니다.

일제 강점기이전, 치료약이 없던 때의 편견과 치료방법이 없던 때에 투병으로 신체적 후유기형을 보고 막연한 공포심에 사로 잡혀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서 탈출시키고 싶었다. 병을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는 외모상의 추형(醜形), 보이는 후유장애만으로 차별하면 범죄다.

1945년 8월22일 84명의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세운 '애한의 추모비'는 오늘도 말 없이 그날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한센인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음성나환자’ ‘한센병력자’라는 말에서도 여전한 차별과 경계를 둔다. 지금은 질병치료에 있어서도 통원이 원칙인 점은 개선된 일이지만 여전히 병력관리에 있어서는 중앙관리 강제등록을 취하고 있는 점은 하루 빨리 개선되어야 할 국가정책이다.

또한 한센 병력자, 미감아라는 꼬리표에는 그 질병의 재발 가능성과 감염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어 이도 차별이다. 무좀이라고 무좀 병력 자라던지, 감기라고 감기병력자라는 말은 쓰지 않는다. 법정 전염병은 정상인 누구나 걸릴 수 있고 병의 확산과 예방을 위한 기준일 뿐이다. 인플루엔자라는 전염병 소위 독감을 병력자로 추적 관리하지 않는다. 인플루엔자와 같은 제 3군 전염병인 한센 병은 소위, 독감보다 걸리기 어려운 질병이다.

‘2005년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면 신환자(엄밀히 말해서 신규 등록자)로 등록한 사람이 39명이었으며 이 중 단 1회도 공식적으로 국가에서 항나제를 투여 받은 적이 없는 순수 신환자는 15명이었다고 한국한센복지협회 연구원의 고영훈 원장은 증언했다.(출처:한센인 차별은 전문가가 더하다? - 오마이뉴스)’ 대한민국 당시 총인구 4725만4천명 기준으로 보면 315만 명당 1명이다.

우리 주변에 촌락을 이루어 살고 있는 한센인 정착촌에는 한센병 환자가 없다고 해야 옳다. 사회의 냉대와 차별로부터 자유롭기 위해 모여 살뿐 우리와 다름없는 이웃이다. 먼 과거, 치료시기를 놓쳐 입은 후유장애의 치료나 노인성 퇴행질환의 치료를 받는 보통의 이웃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의료전문가에게서 조차 경원하는 눈빛을 보면 멀어도 한참 멀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질병을 몰랐을 때 저지른 과오는 시간이 지나 용서와 화해가 가능할 일일지 몰라도 모든 것이 밝혀졌음에도 과거에 사로잡혀 편견과 차별이 사라지지 않는 다면 이는 차별을 떠나 집단적 범죄행위이다. 따뜻한 사회로의 복원, 사람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본질에 물음을 던지기 위해 ‘임계선’을 쓰게 되었다. 

2009년 3월 완공된 소록대교. 고도의 섬이 육지와 연결됨으로서 소록도는 더 이상 세상과 단절된 섬이 아니다. 건너편 거금대교는 2011년 12월에 완공되어 완도까지 이어질 계획이다.

원하지 않는 질병에 걸렸다는 이유만으로 천형의 멍에를 지고 살아야 했던 그 사람이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그 고통을 생각하면 할수록 그 삶의 속을 알아 가면 갈수록 그 고통의 스티그마에 대해 진저리가 쳐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앎도 피상적인 것이라 감히 안다고 이야기 할 수도 없는 것을…….

지금은 사라진 용어인 ‘나병’이란 표현이 상처를 주지는 않겠나 라는 염려와 짧은 지식으로 쓴 글이라 세상 밖으로 내 놓기에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솔직히 앞섬에도 감히 써 본 것은 이 같은 이유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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