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통곡>한센인 향한 ‘편견 없는 시선’이 그 출발

▲ 하늘에서 본 비토섬. 이 섬에 54년의 세월이 흘러도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다.
1957년 사천시 서포면 비토리에서 일어난 한센인 집단학살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그러던 중 2000년대 들어 한센인에 대한 과거 인권침해사례 등이 사회문제화 되면서 다시 관심을 끌었고, 2005년에는 국가인권위원회가 ‘한센인 인권상황 실태조사’를 벌이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됐다.

앞선 <아름다운 섬 비토에 숨은 ‘핏빛’ 이야기> 기사에서 비토리 사건을 간략히 훑어봤지만 궁금증을 완전히 풀지는 못했다. 당시 영복원에서 비토리로 들어가겠다는 결정을 내림에 있어 행정기관이나 정치인, 그 외 이른바 지역 유지들이 뭔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큰데도 이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워낙 큰 사건이 터지자 모두 입을 다물지 않았나 생각된다.

‘비토 한센인 학살사건’에 풀리지 않은 궁금증

또 사건이 일어난 8월 28일, 한센인들이 퇴거 약속을 어기고 왜 계속 남아 있었는지, 남아 있어도 괜찮다고 여기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의문이다. 나아가 한센인들이 설령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비토주민들이 왜 그토록 잔인하게 그들을 죽여야 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생존권을 지키겠다는 절박한 마음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우발적 계기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숨은 이야기가 있는지 궁금한 부분이다.

사건의 수습을 두고도 의혹은 인다. 최소 26명 이상을 집단적으로 살해한 이 사건에 재판부가 왜 그리 아량을 베풀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최종 판결문을 확인하지 못했지만 한센인 집단학살 주동자로 기소된 84명 가운데 실형을 받은 주민은 3명 정도다. 그것도 고작 2년형을 선고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 전남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 비토섬 이상으로 한센인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다.
뉴스사천에선 앞으로 이런 궁금증을 계속 풀어나갈 생각이다. 그렇다고 과거에만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한센병이 더 이상 인간에게 천형이 아님을 확인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는 계기도 마련할 필요가 있겠다.

그런 뜻으로 지난 24일 우리나라 한센인의 온갖 설움과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소록도를 찾았다. 소록도는 전남 고흥에 있는 섬으로 작은 사슴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섬 전체가 국립소록도병원으로 지정돼 있다. 2008년 6월에 인근 녹동항을 잇는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뱃길로만 다닐 수 있었다.

이곳 소록도가 한센인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구한말이던 1910년 개신교 선교사들이 세운 시립나요양원을 세우면서부터다. 이후 일제강점기이던 1916년에는 소록도자혜의원이 들어섰고, 이후 서양 선교사들이 한센인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러던 1930년 12월, 일본 내무성 위생국이 <나의 근절책>을 발간하면서 파시즘적 한센정책이 시작되는데, 이때부터 소록도갱생원에는 강제격리와 강제수용, 강제노동과 강제저축, 시신해부 등 인권침해가 심해졌다.

단종과 낙태, 학살.. ‘비토’와 닮은 애환의 섬 ‘소록도’

특히 단종과 낙태 수술은 인권침해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른바 ‘거세’라 할 수 있는 단종수술은 1936년 처음 등장한 이래 부부가 같은 공간에 살 수 있게 한다는 명분으로 광범위하게 이뤄졌다. 기록에 따르면 1937년 471쌍, 1940년에는 840쌍에 이르렀다. 만에 하나 여성이 임신이라도 하게 되면 강제 낙태수술을 받아야 했다.

▲ 사진왼쪽은 단종수술대. 일제시대 소록도에서 자행된 대표적 인권유린 사례가 단종수술이었다. 오른쪽은 소록도자료관에 있는 비토리사건 관련 전시물.
또 단종수술은 징벌로서도 이뤄졌다. 직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다고 판단되거나 도망치다 붙잡히는 경우 감금실에서 심각한 체벌에 이어 최종적으로 단종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런 단종과 낙태 수술은 한센병(=나병)이 유전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으나, 사실은 유전되지 않는다.

한센병(가톨릭대학교 한센병연구소 자료 참조)

한센병은, 나균(미코박테리아)에 의해 감염되는 만성 피부염 피부질환이다. 과거에 나병(癩病)이라고도 불렀으나 환자의 인권보호 차원에서, 1871년 균의 존재와 치료에 혁혁한 공을 세운 노르웨이의 의사 A.G.H.한센의 이름을 따 한센병으로 부른다.

대부분 사람의 95%는 나균 및 나균항원에 대한 면역력을 가지고 있어 전염성이 매우 낮고, 설사 나군을 보유한 환자의 경우도 리팜핀(리팜피신) 600mg을 1회만 복용하면 체내에 있는 나균 99.99%가 전염력을 상실한다. 따라서 한센병은 비록 제3군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되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성적인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으며, 유전되는 질환은 더더욱 아니다.

감염부터 발병까지 걸리는 잠복기는 최저 3주에서 최장 30년 이상까지도 갈수 있으나, 3주 만에 발병한 사례는 극히 드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의학계에 보고된 바에 따르면 대다수 감염이후 병상이 나타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3~5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병의 경과나 증세, 치료 등은 인간의 면역과 나균의 상관관계에 따라 좌우되는데, 자연 치유되는 경우에서부터 몸의 일부에 국한되는 경우, 전신에 퍼지는 경우 등 다양하다. 나병은 질병 자체 보다 사회학적 ·정신과적 질환으로서 사회공동생활의 융화문제가 더 대두되는 실정에 있다.


단종과 낙태, 감금과 폭행, 심지어 1945년 8월에 일어난 ‘84인 학살 사건’까지, 소록도는 한센인들의 애환이 녹아 있는 곳이다.

이곳 소록도에는 아직도 580여 명의 한센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다. 일부는 병원에서 생활하고 나머지는 가정집에서 생활하는데, 대체로 정부가 지원하는 기초생활수급비에 의존해 생활한다.

▲ 김명호 소록도자치회장. 그는 "한센인들은 지금도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한센인, 아무 것도 아닌데, 편견 때문에 이렇게 산다. 보시라. 내가 어딜 봐서 한센병에 걸렸는 줄 알겠나? 그런데도 동네에서 우물도 같이 못 먹고... 결국 가족을 위해서 집을 떠나야 했다.”

한센인으로서 소록도자치회를 이끌고 있는 김명호 회장의 말이다. 그는 한센병을 비교적 일찍 발견하고 치료해 겉으로는 한센병을 앓았는지 짐작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었다.

“세상이 변했다지만..” 가족과 생이별 여전한 한센인들

“내가 한센병을 앓았다는 걸 알게 되면 자식들이 피해 입는다. 주변에서 어떻게든 알게 된다. 그럼 직장생활도 어렵다. 우리 사회가 아직 그런 세상이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편견, 이런 게 존재한다.”

김 회장은 세계보건기구(WTO)가 이미 1992년에 ‘한국에서의 한센병 종결’을 선언했다며, 국가와 사회가 한센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회장처럼 사회의 따가운 시선이 두려워 가족을 멀리한 채 집단정착촌에서 살아가는 한센인은 1만3000여 명. 국가시설을 포함해 전국 89곳에 흩어져 살아가고 있다. 사천에는 실안동 영복원과 사천읍 예수리 염광마을 두 곳이 여기에 해당된다.

어떤 이는 “죽기 전 딸 한 번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면서도 10대에 연락이 끊긴 자녀를 차마 찾아 나서지 못한다고 했다. 행여나 자식을 찾고서도 누가 될까 걱정이었기 때문이다.

한 할머니는 사위가 의료계에 몸담고 있음에도 차마 얘기를 꺼내지 못한 채 전전긍긍 하다가 2년 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 사위는 1년에 한두 번 장모를 만났지만 류마티스를 앓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다.

▲ 1945년 8월에 일어난 '84인 학살사건' 희생자를 추모하는 비가 소록도 입구에 있다. 조형물에 '한센병은 낫는다'라고 적힌 글이 인상적이다.(오른쪽)
다시 비토리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54년 전 일어난 ‘비토 한센인 학살사건’은 지금보다 훨씬 더한 편견과 차별 그리고 오해가 불러일으킨 비극적 사건이었다.

국가인권위가 2005년에 이 사건을 조사할 무렵, 당시 사건에 참여했던 하아무개 씨의 증언을 기록한 부분을 참고해 보자. 그는 이 사건으로 징역 8개월을 살다가 고등법원에서 징역2년, 집행유예3년을 선고 받아 출옥했다.

“환자들이 온다고 소문이 나니까, 곤양시장에서 이것의 바지락, 해물 등이 괄세(괄시)를 받았다. 채취하고 팔고,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섬에 와서 천막 치고 밥 해먹고 파전하고 그랬다. 신고를 해도 경찰이 못 막아주고 부락민을 오히려 쫓아냈다.”

‘한센인들이 나균을 퍼뜨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비토산 해산물의 천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이 컸던 만큼 한센병 감염에 대한 공포 또한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나균의 전염력이 아주 약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균 감염에 대한 방어와 억제력이 있다는 것, 그 당시에는 잘 몰랐던 사실이다. 한센병에 대한 무지와 공포, 나아가 한센인에 대한 혐오가 엄청난 학살로 이어진 셈이다.

▲ 비토리사건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다. 왼쪽은 비토리 한 주민. 오른쪽은 비토리사건 당시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한센인의 미망인. 이 할머니는 자식이 '한센인의 자식'으로 놀림 받을까봐 아예 자녀를 두지 않았다고 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당시 일을 온전히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 대부분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비토리사건은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 사회가 나서야

지난 일을 떠올리는 것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에게 크나큰 고통이다. 비토리 어느 굴막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언자사(이제와) 그 이야기를 왜 꺼내느냐”며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 “그 사람들 때문에 동네 젊은 청년들 빨간 줄 다 그이고...”라며 말을 흐렸다. 일종의 원망도 남은 셈이다.

반면 서포면 비토리 최규용(70) 씨는 영복원 주민들과 화해의 시간을 갖는 것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당시 14살의 소년으로, 목발을 짚은 채 멀리서 사건현장을 지켜본 사람이다.

“생각해보면 그 당시 영복원에서는 여기에 빈 땅이 있으니까, 개척해서 한 번 살아보려고 들어온 것이다. 반대로 동네에서는 ‘잘못하다간 우리 땅과 섬을 고스란히 내어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한 것 같다. 벌써 몇 십 년이 지났고, 살아 있는 분이 많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서 화해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 비토리사건 당시 14살 소년이었던 최규용 씨(왼쪽)가 취재에 동행한 김학록씨에게 사건현장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과거의 아픈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죽창에 찔리고 불에 타 숨지거나 다친 한센인과 그들의 가족들은 아직 그럴 준비가 안 된 모양이다. 그 당시 사건 현장에서 겨우 목숨을 부지한 지아무개(75, 영복원) 씨는 언론을 통해 여러 차례 진실을 밝히려 노력해온 분임에도 이번 취재는 극구 사양했다. 그는 “비토리주민들과 사죄와 용서의 시간을 갖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제안에도 답을 피했다.

또 중상을 입고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던 정계현 씨의 아들 정아무개(58, 영복원) 씨 역시 비토리 주민과의 만남 제의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진정한 반성과 사과가 전제될지 의문이다. 좀 더 시간을 갖고 생각해봐야겠다.”

피해자 한센인들에게 비토리사건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였다.

▲ 비토리사건으로 희생된 한센인 무덤은 영복원 뒷산에 있다. 멀리 바다 건너 보이는 곳이 비토섬이다.
상처는 당사자가 치료하기 힘든 법. 이 ‘아물지 않은 상처’를 이제는 사회가 나서서 치유해야 할 때다. 다행히 국가는 ‘한센인피해사건의 진상규명 및 피해자 생활지원 등에 관한 법률’을 제정한 상태다. 법 제정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예산 마련이 되지 않아 지원이 늦어졌는데, 2012년엔 상황이 나아질 전망이라니 기대할 수 있겠다.

다만 지역사회는 상처 치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가 고민이다. 국가인권위의 조사로 사실 규명은 어느 정도 된 만큼, 위령제나 추모비 건립 등으로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 유가족들의 마음을 보듬어줄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해 보인다. 한센인을 향한 ‘편견 없는 시선’이 그 첫걸음이다.

*이 취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 사업비를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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