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떠나는 제주 올레길>(15) '한림항과 고내포구'

<혼자 떠나는 제주 올레길>이 글은 '갯가' 시민기자님이 2009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 올레길을 도보로 여행한 뒤 자신의 블로거에 올린 것으로, 이를 일부 고쳐 뉴스사천에 다시 올려주셨습니다. -편집자-

이른 아침 여관에서 나와 어슬렁 어슬렁 한림항을 걸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삼천포항보다 작은 항구지만 항만이 정비가 잘 돼 있다. 바닷가 시장을 돌다보니, 아침 일찍 문을 여는 식당이 보인다. 그리고 여기서 순대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기로 했다. 하지만 도통 입맛이 없어, 절반 이상을 남겨 버렸다. 혹시 맛이 없어 남기는 것으로 오해할까, 주인에게 맛있지만 몸이 지쳐 많이 남겼다고 말했다. 이후 여관으로 가서 배낭을 챙겨 나왔다.

발에 잡힌 물집 때문에 밴드와 소독약도 구입하기 위해, 약국으로 먼저 갔다. 약국 문을 열고 들어서자, 약사가 나를 보곤 연민 섞인 말투로 "에고~ 뭣하러 이 고생하십니까?"라고 말한다. 그리곤 자기도 젊었을 때 여행 많이 다녔다면서, 금방 꺼낸 비타민C 드링크 병 하나를 그냥 건넨다. 나는 청승맞게 약국 안에서 양말을 벗고, 물집이 잡힌 곳을 치료한 뒤 약국 밖을 나섰다. 어쨌거나 여행길에서 믿을 놈은 이 '발' 뿐이다.

▲ 한림항 해변의 솟대 모습.
▲ 한림항 용천수 모습, 지금은 수영장이나 빨래터로 이용한다고 한다.

오늘의 목적지 고내포구다. 그런데 무더운 날씨 때문에 숨이 막힌다. 때문에 체력도 지쳐가, 걷다 쉬기를 반복한다. 길은 해안가에서 한라산 내륙 쪽으로 틀어지고, 이어 작은 마을이 보인다. 나는 이곳에서 잠시 쉬다 다시 출발을 했다.

이후 2-3시간 동안 사람이라고는 만나 볼 수 없는 농로길을 걸었다. 길을 걸으면서 '완전한 자유'는 오로지 혼자라는 외로움을 감내해야 주어지는 '특별한 혜택'이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래서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것이고, 나 '자신'도 많은 것을 버리고 포기해야만 가능한 것. 그것이 바로 '혼자만의 완전한 자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12시께 올레 코스서 약간 떨어진 버들 연못의 커다란 나무 그늘 아래 도착했다. 여기서 잠시 쉬어가려다 아예 돛자리를 깔고 낮잠을 즐겼다. 그런데 꿈 속에서 한라산 신령님(?)이 나타나 " 네 이놈! 지금 네가 낮잠 잘 시간인가? 당장 일어나 앞서 가는 저 사람을 쫓아라"고 말한다. 그리곤 옆에서 들리는 비둘기 소리에 잠에서 깼다. 부스스 일어나니, 저만치 앞에 커다란 밀집모자를 쓰고 작은 배낭을 멘 사람이 혼자 걷고 있었다.

▲ 잠시 숨을 돌린 버들 연못 그늘 아래.

나는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안녕하세요!"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분은 멈칫 쳐다 보고는 다시 길 모퉁이로 사라져 버린다. 나는 서둘러 배낭을 챙기고 그 분 뒤를 따라 나섰다. 이어 모퉁이에서 쉬고 있는 그 분을 만날 수 있었는데.. 허걱! 이쁜 아가씨다. 아가씨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했다. 서울아가씨는 직장을 옮기기 전 올레길을 걷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한다.

▲ 서울아가씨.

나는 속으로 '한라산 신령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평소 거의 착한 일만 하고 살아 간다는 것을 알아 주시고, 외로운 올레길에 이쁜 아가씨 길동무를 만들어 주셨네요. 너무너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서울아가씨와 함께 천천히 길을 걸었다.

이후 아가씨와 함께 남읍리 난대림숲에서 길을 잃고 한창을 헤맸다. 그러다 아가씨와 함께 높은 담이 있는 곳을 넘자, 이 곳에서 빠져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마을 주민이 말하길 "마을에서 오름이 보이지 말아야 한다는 '풍수지리설' 때문에 오래 전부터 마을에서 가꾸어 온 숲"이라고 한다. 숲의 규모는 그렇게 크지 않는데, 숲은 '미로'가 따로 없다.

▲ 마을의 난대림 숲, 앞에 보이는 건물은 마을 제사을 지내는 곳이라고 한다.

이후 고내봉 오름에 올라서니, 마을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돛자리를 깔고 있었다. 그리곤 나에게 다짜고짜 막걸리를 두 잔이나 권하신다. 나는 연거푸 막걸리 두 잔을 들이키고, 백숙까지 얻어 먹었다. 그런데 마을주민 한 분이 나랑 서울아가씨가 부부인지 묻는다. 사연을 말하니, 나보고 억수로 재수가 좋은 사람이라고 부러워한다.

▲ 고내봉에서 내려다 본 제주도 오름들.

이후 서울 아가씨와 함께 고내봉을 내려왔다. 고내포구로 향하는데 서울 아가씨는 도로 주변에서 더 이상 내려가지 않을 예정이라고 한다. 동생이 있는 제주시로 가야하기 때문이란다. 내일 16코스도 함께 가기로 했는데.. 혹시나 서울 아가씨가 배신을 할까 싶어, 내 명함을 건넸다. 서울 아가씨에게 내일 올레길을 나설 때 연락을 해달라고 말한 뒤, 나는 고내포구로 향했다.

혼자 고내포구로 들어서 이리저리 둘러 보니, 야영할 장소가 마땅치 않다. 민박집을 구해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준비했다. 근처 편의점에서 부식을 사온 뒤, 밥을 지었는데 이게 완전 '삼층밥'이다. 어제 돈내코 계곡에선 잘 됐는데.. 다시 물을 더 붓고 뜸을 들여봐도 마찬가지다.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밥을 먹었다. 근데 밥에서 쓴 맛이 난다. 

저녁식사 이후 나는 잠을 청하기로 했다. 내가 묵는 곳은 2층짜리 민박집이다. 그런데 혼자 사용할 수 있게 돼, 주변 사람 눈치 볼 일이 없다. 맘이 편해, 팬티만 입고 잠을 청했다. 이렇게 제주 올레길 세 번째 밤이 지나갔다.

▲ 올레 15코스 종점.

*이 기사는 경남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으로 원고료를 지급하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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